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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합하면 검은색 되지만
빛 합치면 흰색이 된다
촛불도 세상 밝히는 흰색 돼야
그러라고 문재인정부 만든 것
문재인정부의 100일 잔치는 끝났다. 인수위도 꾸리지 못하고 허겁지겁 출발한 처지에 국민적 기대에 부응하는 개혁 보따리를 풀어놓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셔츠 차림에 아메리카노를 한 손에 들고 대통령과 수석들이 청와대 경내를 산책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된 잇단 파격은 연출이라도 보기 좋았다. “커피 잔에 쇼만 가득 들었다”는 비판도 많지만 전임 정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달라졌다는 건 인정해야 한다. 문 대통령이 “지금부터는 실질적 성과를 통해 평가받아야 한다”고 했는데도 100일 기념 행사에서 “신발 끈을 다시 묶자”는 각오와 다짐보다 자화자찬이 넘친 것이 목의 가시처럼 걸린다.

문 대통령은 복이 많은 대통령이다. 박근혜정부 탄핵의 반사이익을 누려 대권을 거머쥐었다. 무엇보다 세상이 새 대통령을 따뜻하게 맞아주고 있다. 대통령의 선의와 진심을 믿기 때문일 것이다. 법정을 오가는 박 전 대통령의 초췌한 모습도 새 정부에 대한 높은 기대와 지지를 떠받치는 데 한몫하고 있다. 확실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김정숙 여사가 말한 대로 오늘 처음 취임해서 일 시작하는 마음으로 초심만 잃지 않는다면 못 해낼 것이 없을 것 같다.


김기홍 논설위원
문 대통령은 그러나 처음 마음먹은 대로 하지 않고 있다. “오늘부터 나라를 나라답게 만드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취임사로 ‘이게 나라냐’고 묻는 국민을 울컥하게 해놓고는 진영을 가리지 않고 합리적 진보부터 개혁적 보수까지 다 함께할 수 있는 대탕평 내각, 국민대통합 정부를 구성하지 않았다. 5대 비리 인사배제, 능력과 적재적소 인사의 대원칙이 흔들리고 있다. 피우진 보훈처장 임명을 보고 정의당 노회찬 의원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라는 영화 제목이 생각난다고 했는데, 이젠 그런 감동을 느낄 수가 없다.

류영진 식품의약품안전처장은 이낙연 총리가 살충제 달걀 파동에서 보여준 무능과 무책임한 태도 때문에 한 ‘질책’을 ‘짜증’으로 바꿔버렸다. 질책과 짜증을 분간하지 못하는 자기합리화의 오류를 청와대도 저지르고 있다. 참여정부나 캠프 출신 인사에게 관대한 검증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실수가 아니다. 창조과학 신봉자인 박성진 포항공대 교수를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하는 다분히 논쟁적인 인사를 해놓고 “종교 문제가 공직자를 지명하고 임명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고 방어막을 친 것은 현실과 인식의 괴리가 빚어낸 일대 사건이다. 박기영 전 과학기술혁신본부장 파동에서 청와대가 보여줬던, “과(過)와 함께 공(功)도 평가받아야 한다”는 식의 변명과 자기합리화를 되풀이하고 있다.

인사권이 대통령의 고유 권한인 건 맞다. 대통령들은 인사권을 침해받는 것을 참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주변에서 인사에 제동을 걸면 자신의 손발을 잘라내 무력화시키려는 것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탕평, 대통합 인사를 약속해놓고 원칙과 어긋나는데도 무리를 해서 자기 사람을 옆에 두려 한다. 문 대통령도 다르지 않다. 정현백 여성부 장관이 ‘문제의 남자’ 탁현민 행정관 거취에 대해 “사퇴 의견을 전달했으나 결과에 대해서는 좀 무력하다”고 한 것은 청와대에 이미 벽이 생겼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등잔 밑이 어두운 것처럼 촛불 밑의 그림자가 짙어지고 있다는 걱정이 늘고 있다. 등잔 밑이 어두운 것은 등잔 대가 등잔불의 빛을 막아서 생기는 그림자 때문이지만 촛불 밑이 어두워진 것은 촛불 정신이 희미해지고 있어서다. 지난 엄동설한의 광장을,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어달라는 소망을 촛불로 밝힌 것은 국민들이다. 물감을 합하면 검은색이 되지만 빛은 합치면 흰색이 된다. 국민이 들었던 촛불도 하나 둘 모으면 당연히 세상을 환하게 밝히는 흰색이 되어야 한다. 그러라고 촛불로 문재인정부를 만들어준 것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 주말 더불어민주당 의원들과의 오찬에서 “정권이 바뀐 것뿐 아니라 국민 삶이 바뀌었다는 평가를 받고 싶다”고 했다. 그러러면 촛불의 힘으로 탄생한 집권 세력이 앞장서서 촛불 밑에 그늘이 생기지 않게 해야 한다. 제 자신과 주변부터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김기홍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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