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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역사의창] 남한산성의 두 사람, 김상헌과 최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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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10-12 21:14:01 수정 : 2017-10-12 21: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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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때 척화·주화파의 중심 인물 / 후세 평가 극단… 최명길 재평가는 다행
최근 1636년(인조 14년)의 병자호란을 소재로 한 영화 ‘남한산성’이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고 있다. 비록 380년 전의 역사이지만 국방이나 외교에 대한 적절한 대책 없이 무모하게 전쟁을 수행하다가 당한 치욕은 현재에도 시사점을 주는 바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1627년 후금은 정묘호란을 일으킨 후 조선과 강화도에서 형제관계를 맺고 물러갔다. 그러나 이후에도 양국의 관계는 개선되지 않았고, 후금이 군신관계까지 요구하자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는 조선 조정은 전쟁불사를 외쳤다. 1636년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꾸었고, 청 태종(홍타이시)은 12만 대군과 함께 조선 침략에 나섰다. 병자호란의 시작이었다.

강화도로 가는 피란길이 막힌 인조는 조정의 대신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피란길을 돌렸지만, 곧 청군의 포위망이 형성됐고 형세는 계속 어려워졌다. 군병과 군량의 부족에 시달리는 상황에서도 초기에는 김상헌(1570~1652)과 같은 척화파의 목소리가 높았다. 그러나 홍이포로 무장한 청군의 위세가 커지자 주화파 최명길(1586~1647)이 적극 나서서 전쟁을 끝내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계속 싸워야 한다는 척화파와 화의를 맺어야 한다는 주화파, 그 대립의 중심에 영화의 두 주인공 예조판서 김상헌과 이조판서 최명길이 있었다.

청군은 포위망을 구축하고 홍이포를 인조가 머물던 행궁에 가끔씩 발사하면서 조선 스스로가 항복하기를 기다렸다. 형세가 거듭 불리해지면서 인조는 최명길의 건의대로 항복을 청하는 문서를 작성하도록 했다. 항복문서를 본 김상헌은 실성통곡하면서 문서를 찢어버렸다. 김상헌에게 있어서 오랑캐에 대한 항복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최명길은 달랐다. 전쟁을 막고 백성을 구하는 현실이 이념보다 우선이라고 판단했다. 최명길은 “대감은 찢었으나 우리는 마땅히 이것을 주워야 한다”고 하면서 청에 보내는 답서를 모아 다시 붙였다.

1637년 1월 30일 인조의 항복으로 전쟁은 종결됐지만, 남한산성에서 맞섰던 두 사람은 청나라 수도 심양에서 다시 만났다. 전쟁이 끝난 후 청에서는 척화파 대표 김상헌을 심양으로 보낼 것을 요구했고, 1640년 12월 심양으로 간 김상헌은 1645년 2월 석방될 때까지 억류됐다. 최명길은 명나라와 비밀히 외교를 했다는 이유로 청에 압송돼 1642년 심양으로 끌려가 1643년 2월 남관의 감옥으로 이송됐다. 그런데 이곳에는 이미 억류돼 있던 김상헌이 있었다. 남한산성에서 치열한 논리 대결을 펼쳤던 두 사람이 청의 심양 감옥에서 함께 갇히는 운명을 맞은 것이다.

당시 두 사람은 함께 시를 주고받았는데, 이 시에는 서로 상대방을 인정했음이 나타난다. 최명길은 김상헌이 변함없이 절개를 지킨 것에 존경의 뜻을 표시했고, 김상헌 역시 최명길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조선을 위해 일관된 행동을 보인 것을 이해하게 됐다. 척화파와 주화파로 다른 정치노선을 걸었던 두 사람. 이들에 대한 평가는 조선 후기에는 극단으로 나타났다. 김상헌이 충절의 상징으로 존숭의 대상이 된 반면 최명길의 실리외교는 비난의 대상이 됐다. 최근에 이르러 명분보다 국가와 백성을 우선시한 최명길의 실리적 외교 수행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럽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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