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숭총림 수덕사 방장 설정(76·사진) 스님에 얽힌 일화다. 열한 살 난 아들이 남의 물건을 훔쳤다는 말을 들은 아버지는 회초리를 들었다. 일제강점기 충남 예산에서 주역의 대가로 이름을 날린 아버지는 ‘사람은 어느 경우에도 강직하게 살아야 한다. 그것이 장부다운 삶’임을 강조한 대쪽 같은 선비였다. 베틀의 뱁댕이 막대 몇 개가 부러지도록 맞은 아들은 집을 나왔다. ‘나는 집과 인연이 없는가 보다’고 생각한 아들은 낮부터 내린 눈이 제법 많이 쌓여 있던 저녁 나절, 맨발로 30여 리의 길을 무작정 걸고 또 걸었다. 그 일로 동상에 걸려 발을 자를 뻔했다.
이후로 아버지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들어 끝장을 보는 아들의 성정을 알아차렸다고 한다. 그 아들이 오는 31일 제35대 조계종 총무원장에 취임하는 설정 스님이다. “무슨 일이든 정성을 다하자”는 게 스님의 철학이다.
오는 31일 제 35대 조계종 총무원장에 취임하는 설정 스님은 “위기에 몰린 종단을 개혁하고 신도의 신뢰를 회복할 것”이라고 말했다. 불교신문 제공 |
스님 특유의 강직함은 유명하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아닌 것은 아니었다. 40대 초반 젊은 나이에 임명된 수덕사 주지 시절이었다. 주지를 맡은 지 1년도 채 안 된 1980년 계엄군에 의해 자행된 10·27법난의 시작이었다. 느닷없이 군인 몇명이 수덕사 대웅전을 짓밝고 들어와 스님을 대전 보안대로 끌어갔다. 스님은 신문을 당하면서도 잠을 자지 않은 채 단식하며 좌선했다. 매일같이 군부를 지지한다는 조서를 쓰라고 윽박지르는 군인의 강요에도, 한 줄 쓰지 않고 버텼다.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나가서 얘기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라는 요구도 단호히 거절했다. 고문으로 부러진 몽둥이가 널부러져 험악한 보안대 지하 감방에서 그렇게 열흘간 버티다 석방되었다. 그 얼마 후엔 사회에 기여한 공로로 표창장을 받으러 서울로 오라는 얘기를 듣고선 그 자리에서 거절했다. 어릴 적 부친에게 오해받아 매 맞을 당시에도 ‘아닌 것은 아니다’고 버틴 스님의 뚝심이었다.
스님은 “죽음이라는 위기 앞에서 수행자 본연의 삶을 선택한 것은 결국 나의 의지를 시험한 것”이라고 회고했다. 20대 후반 늦깎이 대학생이 되려고 공부했으나 시험에 떨어졌고 땡전 한 푼 없었다.
“생을 놓아 버리려고 생각했지만 너무 배가 고팠다. 두 달 동안 목포에서 해남까지 이 마을 저 마을로 다니면서 나락을 줍는 일도 거들어 주고 밥을 얻어먹었어. … 밥이며 잠자리를 내 손으로 해결하는 절박하고 극한 상황에 나를 몰아넣고 내가 어떤 사람인가 바라보는 시간이었다. 너무 나약했고 덜 치열했고 덜 하심(下心)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설정 스님의 설법은 알아듣기 쉽다. 선사들의 말이나 경전을 인용하기보다 자신의 언어로 바꿔 부처의 설법을 전한다. 유연한 마음으로 한 수행법만을 고집하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개성적인 수행법을 따른다. 스님은 젊은 시절 온몸으로 부딪치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노력했던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인간에 대한 이해와 관용이 넓고 깊어진 것이라고 했다.
스님은 “승려는 먹을 것, 입을 것, 잠, 이렇게 세 가지가 부족해야 하며 공부와 노동이 함께해야 힘 있는 공부가 된다”면서 승려가 가지고 있어야 할 세 가지 생명줄로 신심, 원력, 공심(公心)을 들었다. 스님은 “60여 년 동안 이(理)와 사(事)를 겸비하여 수행에 매진해왔다”며 “수행자로서 결코 시간을 허비하며 살지 않았다고 자부한다”고 했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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