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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타워] 헌법을 고치면 정치가 바뀔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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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10-29 23:22:02 수정 : 2017-10-29 23: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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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2018년 6월 개헌 마지노선으로 / 분권형이든 순수한 대통령제이든 / 제왕적 대통령으로 변질할 가능성 / 차단하기 위한 확실한 장치를 둬야 “프랑스는 총리가 너무 자주 바뀌어 그들 중 내가 기억하는 이름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프랑스 임시정부 지도자 샤를 드골에게 던진 말이다. 극심한 모욕감을 느꼈으나 드골은 꾹 참고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훗날 회고록에 그는 “루스벨트의 결례가 현실 그대로인데 내가 어떻게 답할 수 있겠는가”라고 적었다.

의원내각제를 택한 프랑스 제3공화국(1870∼1940)과 4공화국(1946∼1958)은 합쳐서 82년간 내각이 120번 넘게 교체될 정도로 정치가 불안했다.

나치 독일이 서유럽 침공을 본격화한 1940년에도 그랬다. 바다 건너 영국은 총리 윈스턴 처칠을 중심으로 거국내각이 출범해 항독 의지를 다지는 사이 프랑스는 그나마 있던 내각마저 둘로 쪼개졌다. 주전파 총리 폴 레노가 사임하자 주화파 필립 페탱이 새 내각을 꾸리고 독일에 항복했다.

조국이 몰락한 원인을 ‘나약한 정부’에서 찾은 드골은 종전과 동시에 강력한 대통령제 개헌을 주장했다. 1958년 대통령제를 택한 제5공화국이 들어서며 비로소 프랑스 정치는 안정을 찾는다. 이후 대통령 간선제를 직선제로 바꾸고 대통령 임기를 7년에서 5년으로 단축하는 등 부분 개헌이 이뤄졌으나 5공화국 헌법 뼈대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20세기 들어 헌법을 고쳐 정치를 바꾼 거의 유일한 나라가 프랑스다.

한국이 처한 상황은 프랑스와 반대다.

대통령 권력이 너무 강해 벌어진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단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 개헌론의 출발점이다. 현재 대통령 자체는 존치하되 그 헌법상 권한을 대폭 축소하고 대신 국회에서 뽑은 총리가 국정운영을 주도하는 ‘분권형 대통령제’를 유력한 대안으로 거론하는 모습이다. 미국처럼 총리 없는 4년 중임의 순수 대통령제로 가자는 목소리도 만만찮다.

제왕적 대통령의 출현은 순전히 현행 헌법 탓일까.

전문가들은 헌법이 규정한 국회의 총리 임명동의권(86조 1항), 총리의 행정각부 통할권(86조 2항)과 장관 임명제청권(87조 1항)만으로도 분권형 대통령제 운영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입을 모은다. 헌법이 문제가 아니고 헌법을 안 지키는 대통령과 정치인들한테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장관 임명제청권을 쥔 총리는 “인사검증 기능이 총리실에 없어 실질적 제청권 행사가 불가능하다”며 자신의 헌법상 권리를 고스란히 대통령에게 헌납하고 스스로 ‘의전총리’로 주저앉았다. 역대 대통령 모두 이를 당연시하며 총리의 권한을 빼앗아 본인이 행사했다.

김태훈 사회부 차장
유념해야 할 것은 분권형이든 아니든 일단 대통령제를 택하는 순간 대통령 권력은 생물처럼 자가증식하기 마련이란 점이다.

한승주 고려대 명예교수는 1993년 김영삼정부의 첫 외교장관에 발탁됐고 2003년에는 노무현정부의 초대 주미대사로 기용됐다.

그는 최근 펴낸 회고록에서 “대사로 있을 때 대미관계를 포함한 정책결정에서 장관으로 있을 때보다 외교부의 비중이 훨씬 낮아져 있었다”며 “정책결정에서 심지어 장관도 그다지 큰 역량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점이 아쉬웠다”고 토로했다.

10년 만에 외교정책 결정 주도권이 외교부에서 청와대로 완전히 넘어갔다는 것이다. 그 사이 정작 헌법은 한 글자도 바뀌지 않았다. 이는 노무현정부 이후 정권들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외교부 말고 다른 부처들 역시 사정은 비슷할 것으로 짐작된다. 국회 인사청문회 등 엄격한 검증절차를 거쳐야 하는 장관은 허수아비고 대통령 마음대로 임명하는 청와대 참모진이 실세라면 국회나 청문회가 왜 필요할까. 대통령이 존속하는 한 청와대가 내각을 제치고 정책결정을 주도하는 식의 국정운영은 언제든 현실화할 수 있다.

문재인정부가 내년 6월을 개헌의 마지노선으로 제시했다. 분권형 대통령제이든 순수 대통령제이든 제왕적 대통령으로 변질할 가능성을 아예 차단하기 위한 확실한 장치를 둬야 한다. 외국인들한테 ‘한국은 전직 대통령이 너무 자주 구속돼 기억나는 성공한 지도자가 한 명도 없다’는 말을 들어서야 되겠는가. 20세기의 프랑스처럼 21세기에는 한국이 헌법을 고쳐 정치를 바꾼 첫번째 나라로 기록되길 바란다.

김태훈 사회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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