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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안 쓰면 녹스는 게 당연한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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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11-10 20:59:49 수정 : 2017-11-10 23:2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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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can ask me whatever you want.”

궁금한 건 다 물어보라니, 이런 취재원이 또 있을까. 지난달 14일 서울 반포 한강공원에서 열린 씨름 페스티벌, 캐나다인 질스씨는 번외 경기인 관중 즉석 대결을 마치고 몸에 묻은 모래를 털어내며 말했다. 신장 190㎝, 32세의 건장한 외국인의 경기 상대는 경기도 평촌에서 부인과 나들이를 나왔다가 사회자에게 지목된 63세 박대동씨였다. 기자로서는 구미가 당기는 그림이다. 몰려든 구경꾼들은 박씨의 승리는 고사하고 그가 다칠까 염려했다. 그러나 박씨는 자신의 큰아들(35)보다 젊은 질스씨를 바깥다리걸기 한판으로 보기좋게 무너뜨렸다. 사회자는 “역시 씨름은 힘보단 기술이죠”라며 박씨를 치켜세웠다.

이쯤이면 내용도 좋다. 기자들이 소위 말하는 ‘얘기되는’ 취재원이다. 질스씨에게 다가가 어깨를 자신 있게 두드렸다. 영어 대화는 꽤나 오랜만이었지만 정규교육과정 12년 외에도 그동안 들인 사교육비만 중고차 한 대 값은 족히 넘는다.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매일 밤 습관처럼 듣던 미국 스탠드업 코미디가 채워주리라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은 이럴 때 쓰는 말이었다. 수많은 질문이 머릿속을 스칠 뿐, 입 밖으로는 실망스러운 수준의 영어 단어들이 나열됐다. 떠듬떠듬 이어가던 질문은 자괴감에 가로막혀 이내 침묵으로 변했다. 결국 질스씨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황급히 자리를 떠야 했다.

흔히 말하는 문법 위주 한국식 영어교육의 폐해가 이제서야 나타난 걸까. 그럴리가 없다. 4년 전만 해도 해외 인턴십 과정에서 영어로 업무를 볼 정도로 영어는 자신 있었다. 따라서 영어 인터뷰쯤이야 어려울 리 없다고 여겼는데 결과적으로 ‘예전 그 실력’이라는 착각의 늪에 빠져 있던 셈이다. 돌이켜보면 인턴십 이후 영어로 대화해본 경험은 손에 꼽는다. 휴가차 떠난 해외여행에서 음식 주문할 때나 몇 마디 써본 게 전부다. 안 쓰는 칼 녹스는 게 당연한 건데. 고작 자막 달린 스탠드업 코미디 영상 몇 개 본 것으로 이전 실력이 그대로일 것이라 믿었다. 한편으론 이미 녹슨 실력을 알고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자신에 대한 정확한 진단을 가로막은 측면도 있다.

이동수 체육부 기자
비단 언어뿐만이 아니다. 사람들은 과거의 정점에서 내려오길 거부한다. 항상 ‘왕년의’ 스타들이 좀처럼 예전의 화려한 지위로 복귀하지 못하는 이유다. 이들은 안일함과 두려움 뒤에 숨어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돌아보길 거부한다.

신경과학 분야 권위자인 탈리 샤롯은 이를 ‘낙관주의적 편향(optimistic bias)’이라고 부른다. 샤롯은 한 가지 실험을 진행한다. 자신이 암에 걸릴 확률이 50%라 믿는 A와 10%에 불과하다고 확신하는 B가 있다. 샤롯은 이들에게 실제 평균이 30%라고 알려준 뒤 다시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이에 A는 자신의 암발병률을 실제 평균에 가까운 35%라고 수정하지만, B는 기존보다 고작 1%포인트 증가한 11%라 대답했다. B는 자신의 낙관주의적 편향을 반박하는 정보는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샤롯은 이런 작은 편향들이 합쳐져 더 큰 착각이 될 때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고 경고한다. 우리는 자신에게 얼마나 솔직한가. 얼마나 겸손한가. 자신에 대한 평가는 항상 짜게 내릴 필요가 있다.

이동수 체육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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