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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근의인문상식] 서울성곽의 스토리텔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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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11-16 21:29:34 수정 : 2017-11-16 21:2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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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장성, 맹강녀 전설로 단순 담장 탈피 / 이야기 없는 역사, 쓸데없는 전시장 불과
어디론가 훌쩍 떠나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계절이다. 요즘 서울 성곽을 가보면 찾는 사람이 부쩍 늘어났다. 베이징에 가면 만리장성이 있다지만 서울성곽은 그 나름의 장점을 가지고 있다. 서울 시내 어디에서도 도보로 접근이 용이하며, 몇몇 험준한 구간을 제외하면 편안하게 다닐 수 있다. 다들 바쁘게 살아가는 일상이지만 서울 성곽을 찾아 느릿느릿 걸으며 지나가는 시간을 돌이켜볼 수도 있다.

서울성곽은 만리장성에 비해 커다란 단점이 있다. 만리장성은 맹강녀(孟姜女) 전설과 짝이 된다. 맹강녀는 범기량(范杞良)과 신혼 생활을 누릴 즈음 진시황이 만리장성의 축조를 위해 전국에 걸쳐 건설 인원을 동원하는 명령을 내렸다. 범기량은 달콤한 신혼 생활을 접고 만리장성을 축조하는 현장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맹강녀는 남편에게 줄 옷을 만들어 공사 현장을 찾아갔다. 공사 현장에 도착했을 때 맹강녀를 기다리는 것은 남편이 아니라 남편이 죽었는데 시신이 어디에도 있는지 모른다는 슬픈 사연이었다.

맹강녀는 남편이 매몰 사고로 죽었다는 현장을 찾아 며칠 낮밤을 울었다. 하늘이 감동했지만 매몰 구간이 다시 열리면서 다량의 시신이 드러났다. 하지만 유골이 뒤섞여 있는 터라 남편의 시신을 수습할 수 없었다. 이에 맹강녀는 손가락을 깨물어 핏방울을 유골마다 일일이 떨어뜨린 결과 남편 시신을 찾을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맹강녀곡장성(孟姜女哭長城)’의 이야기이다. 지금도 현재 허베이성 친황다오시(秦皇?市) 산하이관 부근에 맹강녀묘가 건립돼 방문객의 발길이 미치고 있으며, 또 맹강녀의 동상은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만리장성을 바라보고 있다. 맹강녀 전설로 만리장성은 길기만 한 담장이 아니라 사랑과 슬픔을 담은 인간다운 건축물로 재창조된다.

서울 성곽이 18㎞에 걸쳐 돌을 쌓아올린 건축물에 지나지 않으려면 그와 관련된 인간다운 스토리텔링이 필요하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세종 4년 1월 14일 산신에게 제사지내고, 15일 공사가 시작돼 2월 23일 보수작업이 끝났다. 이때 동원된 인부(군인)는 32만2460명이고, 기술자 공장(工匠)이 2211명, 각 지역에서 인부와 군사를 대동하는 행정실무의 경력(經歷)과 수령이 115명이었다. 당시 서울 인구가 10만명으로 추정되므로 3배 이상의 인구가 새로 유입된 셈이다. 공사가 끝나고 30여만명이 귀로에 오르며 자신의 소·말·베·돈을 쌀로 바꾸니 쌀값이 천정부지로 뛰어올랐다. 이들 중 울산 지역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동시에 징발된 사례가 있었다. 불행히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아들은 아비의 시신을 업고 귀로에 오르며 아침저녁으로 자기가 먹는 밥으로 제사를 지내고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와 장례를 지냈다고 한다.

울산 부자의 이야기는 서울 성곽과 관련해 기나긴 여정, 까마득한 귀로, 부친의 사망, 시신의 운구, 그리고 성공적인 장례라는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울산 지역 사람이 보수한 지역에 울산 부자의 사당을 마련한다면 서울 성곽은 인간다운 스토리텔링을 지닌 건축물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유구한 역사는 이야기와 함께 빛나는 문화 예술을 만들지만 이야기 없는 역사는 쓸데없이 높이와 길이를 과시하는 전시장에 불과하다.

신정근 성균관대 교수·동양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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