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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3호선’ 700년만의 부활…타임캡슐이 된 뻘 [강구열의 문화재 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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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04-21 15:19:24 수정 : 2019-04-21 21: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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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중고고학<2> 700여 년만에 옛 모습 그대로 되살아난 ‘마도3호선’

지난 2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성격의 그림들을 공개했습니다. 신라의 궁궐터인 월성의 주변 경관을 재현한 것이었습니다. 무려 1600여년 전 신라의 풍경이 그림으로나마 되살아난 겁니다. 상상해서 그린 게 아니었습니다. 연구소는 월성 주변 식물의 종류, 양 등은 물론 서식지의 위치까지 과학적으로 추론해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작업의 재료입니다. 해자(방어 등의 목적으로 성 주위에 둘러 판 연못)에서 발굴한 목재구조물, 씨앗, 열매 등이 근거가 되었죠.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1600년전 경주 월성 주변으로 풍경으로 제시한 그림. 

그런데 씨앗과 목재구조물, 열매가 어떻게 1600년이란 시간을 견뎌낼 수 있었을까요? 유기물이라 미생물이나 세균, 공기 등에 의해 시간이 지나면 분해되기 마련인데요. 물 속에 있었던 덕분입니다. 물로 차있던 해자 구역에 미세한 입자의 흙이 쌓여 분해를 일으키는 공기나 미생물 등과의 접촉을 막은 겁니다. 

 

알고 있는 문화재를 한 번 떠올려보시죠. 오래된 것일수록 돌이나 금속으로 된 유물이 많을 겁니다. 나무나 종이 등을 재료로 한 유물은 화재 등에 취약하고, 시간의 경과에 따라 소멸되는 게 자연스럽기도 합니다. ‘타임캡슐’ 역할을 한 물 속의 흙에 갇혀 이런 일반적인 생애주기에서 예외가 되는 게 수중 유물들입니다.  

 

바다에서 이뤄지는 수중발굴을 통해 이런 유물들을 제법 많이 건져 올렸습니다. 특별히 주목되는 게 고선박과 목간입니다. 

 

◆700여 년만에 옛 모습 그대로 되살아난 ‘마도3호선’

 

1265년 무렵, 배 한 척이 고려의 임시수도 강화도로 향해 지금의 여수 인근 포구를 출발했습니다. 온갖 화물을 잔뜩 실은 배였습니다. 선원들은 물론 출항을 지켜보는 이들 모두가 무사한 항해를 기원했으나 ‘안흥량’(충남 태안 인근 해역)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격렬한 파도가 회오리치고, 암초가 도사린 한반도의 바다 중 가장 험하다는 곳입니다. 

 

2009년 9월 12일, 태안의 마도 주변 바다를 탐사하던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수중발굴팀이 고선박을 찾아냈습니다. 도자기 91점, 목간 35점, 금속 62점 등 많은 유물이 나왔습니다. 약 750년 전 강화도로 향했으나 끝내 안흥량을 넘지 못한 그 배가 긴 잠에서 깬 것입니다. 

수중발굴을 통해 확인한 마도3호선의 모습.  

‘마도 3호선’으로 명명된 이 배는 지금까지 발견된 14척의 한국 고선박 중 가장 완형에 가깝습니다. 길이 약 12m, 폭 약 8.5m, 선심(船深·배의 깊이) 약 2.5m 규모입니다. 바닥은 5단, 좌·우현은 각각 10단, 9단의 부재가 남아 있습니다. 선수, 선미의 형태도 보여줍니다. 연구소는 “마도 3호선에서 처음으로 돛대를 인양했다. 갑판부만 소실되고 원래의 90% 이상이 남아 있지 않나 싶다”고 밝혔습니다. 

 

연구소는 마도3호선을 수중에서 선체를 분해해 인양하던 이전의 방식이 아니라 통째로 발굴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비용 문제가 걸렸습니다. 통째로 인양할 경우 해체하는 것보다 비용이 10배 이상 들 것으로 예상됐습니다. 유지, 관리 비용도 만만치 않습니다. 최소 10년 이상 보존처리를 해야 하는 고선박의 특성상 인양을 한다고 해도 보존처리를 할 시설도 부족합니다. 발견 후 시간이 꽤 흘렀지만 여전히 마도3호선이 바다 속에 남겨져 있는 이유입니다. 

 

고선박은 수중발굴의 시작이었습니다. 1976년 전남 신안의 바다에서 발굴한 ‘신안선’이 한국 수중발굴의 첫걸음이었습니다. 고선박은 종종 대규모 유물 발굴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수중고고학의 절정이기도 합니다. 2007~2008 충남 태안에서 발굴된 태안선에서는 고려청자 등 무려 2만5000여점의 유물이 나왔습니다. 

바다 속에서 건져 올린 유물을 모은 전시회. 

◆‘화물표’ 목간, 역사의 길잡이가 되다.

유승제 목간. 

고선박에 비하면 목간은 볼품 없는 유물입니다. 사실 무엇과 비교해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수중목간은 화물표 역할을 했습니다. 물품 종류, 수량, 발송자와 수신자 등을 적었죠. 이런 물건을 공을 들여 만들 이유가 없습니다. 나무를 적당한 크기로 깎고, 화물 정보를 휘갈겨 쓴 게 전부입니다. 하지만 담고 있는 내용은 구체적이고, 품고 있는 이야기는 재밌습니다. 

복원 작업을 할 당시의 신안선. 

신안선은 1323년 일본 도후쿠사(東福寺) 등이 발주한 엄청난 수량의 무역품을 싣고 중국 경원항을 출발해 하카타항으로 가던 중국배였습니다. 바다를 오간 수많은 무역선 중의 하나였을 뿐인 이 배의 여정이 700년이나 지난 지금까지 이처럼 꼼꼼하게 알려진 것은 목간 덕분입니다. 신안선에서 발굴된 300여점의 목간 중에는 ‘至治三年’(지치삼년·‘至治’는 원나라 연호), ‘東福寺公物’(동복사공물) 등을 적은 것들이 있습니다. 마도 2호선에서는 고려청자매병이 ‘樽’(준)이라 불렸으며 꿀, 참기름 등을 담는 용기로도 사용되었다는 걸 보여주는 목간이 나왔습니다. 목간 덕분에 고선박의 활동 시기가 확실해지면서 실려 있던 수만점의 도자기들의 성격이 보다 분명해져 도자사 연구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목간에 담긴 정보를 푸는 과정이 퍼즐맞추기 마냥 재밌습니다. 마도 3호선이 ‘최고 권력자인 무인집정 김준 등에게 보내는 화물을 싣고 가다 1265∼1268년 침몰한 배’라는 사실을 파악하는 과정을 살펴볼까요. ‘辛允和侍郞宅上’(신윤화시랑택상·신윤화 시랑 댁에 올림), ‘兪承制宅上’(유승제택상·유승제댁에 올림)이라고 적힌 목간이 결정적인 단서입니다.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신윤화는 1260년에 장군을 지낸 인물로, 장군과 ‘시랑’은 같은 4품의 벼슬입니다. 이 배가 1260년 무렵 항해한 선박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유승제’는 ‘승제’(고려시대 왕명 출납 담당 관직)라는 벼슬에 있는 유씨 성을 가진 인물을 가리킵니다. 1260년경 승제 자리에 있던 사람은 유천우입니다. 재직 시기는 1265∼1268년입니다. 김준의 존재는 ‘事審金令公主宅上’(사심김영공주택상·사심 김영공님 댁에 올림) 목간에 확인됩니다. ‘영공’은 제왕에게나 쓰던 극존칭으로 1260년대 중반에 영공이라는 불릴 수 있는 인물은 당대 최고의 권력자인 김준밖에 없습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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