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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경기장 품은 몽촌토성… 역사·문화공간 아름다운 조화 [스페이스도슨트 방승환의 건축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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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11-13 06:00:00 수정 : 2024-11-12 21: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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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자연과 문명의 균형’… 올림픽공원과 세계평화의 문

서쪽 토성·몽촌호 동쪽 6개 경기장
다른 두 영역 원 안에서 어우러져
건축가 김중업 作 ‘세계평화의 문’
도심·녹색쉼터 잇는 상징적 관문
서울올림픽, 선수촌 등 13곳 신축
IOC, 시설 활용 모범사례로 꼽아

올여름 파리 올림픽은 우리나라 선수들의 활약뿐만 아니라, 경기의 배경으로 역사와 낭만이 깃든 파리의 풍경을 감상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파리올림픽조직위원회가 개회식 장소로 센강을 선정하고 파리의 명소를 경기장으로 활용한 이유는 이번 올림픽의 주제가 ‘혁신’, ‘공유’, 그리고 ‘지속가능성’이었기 때문이다. 조직위는 새로운 건물을 지을 때 발생하는 탄소 배출량을 줄이고 무리한 시설 투자로 우려되는 부채 문제를 최소화하고자 했다.

과거와 현재 담은 도심 속 쉼터 1500년 전 백제인들이 만든 몽촌토성과 88서울올림픽 때 사용된 시설들이 어우러진 올림픽공원은 자연과 문명의 균형을 보여준다. 또한 양재대로 건너편 올림픽선수촌아파트까지 하나의 영역을 이루며 역사에서 비롯된 현재의 삶을 상징한다.

한 달도 되지 않는 올림픽을 위해 대규모 시설을 짓는 결정이 경제적이지 못하다는 건 누구나 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개최국들이 대규모 투자를 했던 이유는 올림픽을 통해 자국의 이미지를 제고하고 신장된 국력을 과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실제 제1회 아테네 올림픽 이후 새로 지은 시설의 비율이 가장 높았던 올림픽은 1936년 베를린이었다(총 20개 중 7개 시설 신축). 나치는 베를린 올림픽을 통해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 이미지를 벗고 발전된 독일의 산업을 국민들에게 알리고자 했다.

흥미롭게도 베를린 올림픽 이후 제2차 세계대전으로 두 차례 취소된 올림픽이 다시 열린 장소는 나치의 집중 포격에도 끝까지 항복하지 않은 런던이었다. 영국은 런던 올림픽을 통해 빠르게 복구된 도시의 모습을 전 세계에 알리고자 했다. 그럼에도 재정적으로는 여전히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21개 시설 모두 기존 시설을 재사용했다.

이후 방송설비의 발달로 올림픽이 전 세계로 생중계되면서 신축시설의 비율은 제16회 멜버른과 제23회 로스앤젤레스(LA)를 제외하고 35% 미만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이런 흐름이 바뀌기 시작한 시점이 바로 올해 파리 올림픽이다. 심지어 다음에 개최될 LA 올림픽은 기존 시설을 100% 활용할 계획이라고 한다.

1988년 서울올림픽도 최빈국이었던 대한민국이 ‘한강의 기적’을 통해 불과 35년 만에 올림픽을 개최할 정도로 성장했다는 스토리를 세계에 알리려는 목적이 있었다. 그래서 30개의 올림픽 시설 중 13개를 새로 지었다(신축시설 비율 43%). 그중 6개가 송파구에 있는 올림픽공원에 집중돼 있다.

서울 올림픽의 주경기장은 언제가 될지 기약할 수 없지만 올림픽 개최를 위해 1977년 미리 착공한 서울종합운동장으로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 외 시설을 확충하기 위한 부지가 필요했다. 전두환 정부는 1981년 올림픽 개최 확정 후 당시 버려져 있던 강동구 이동(二洞)의 야산 일대 145만㎡를 올림픽공원 부지로 지정했다.

착공은 1984년 4월에 했다. 하지만 부지 내 야산이 백제의 한성 시절 몽촌토성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복원작업도 함께 진행됐다. 현재 올림픽공원의 배치를 보면 서쪽은 몽촌토성과 해자 역할을 했던 몽촌호가 이루는 자연의 영역이고, 동쪽은 서울 올림픽 때 쓰였던 6개 경기장과 그 외 한국체육대학을 비롯한 다양한 시설이 밀집된 문화·체육 영역이다. 두 영역은 자연스러운 원 안에서 적당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여기에 더해 원 안에 있는 88잔디마당에서 시작된 축이 한얼광장과 만남의광장으로 이어지며 남동쪽에 있는 올림픽선수촌아파트로 뻗어 나간다. 그리고 방사형으로 배치된 올림픽선수촌아파트의 초점이 된다. 몽촌토성, 올림픽경기장, 올림픽선수촌아파트는 각각이 분리된 영역이 아니라 자연과 문명의 공존 또는 역사에서 비롯된 현재의 삶을 상징하는 듯하다.

올림픽공원은 1986년 아시안게임에 맞춰 준공된 이후 공원 내 시설들이 하나둘 늘어나게 된다. 현재는 체육뿐만 아니라 문화, 전시, 공연까지 다양한 성격의 시설들이 공원을 가득 채우고 있다. 한편으로는 공원 내 몽촌토성이 사적으로 지정되지 않았거나 아예 없었다면 공원이라기보다는 시설의 집합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은 건물이 몽촌토성을 둘러싸고 있다.

올림픽공원 내 다양한 시설 중 형태적으로나 상징적으로 가장 주목할 만한 건물은 공원 서쪽에 있는 ‘세계평화의 문’이다. 강남을 대표하는 테헤란로는 송파구로 들어오면서 올림픽로로 이름이 바뀌는데, 올림픽로는 주경기장이 있는 잠실종합운동장과 올림픽공원을 연결한다. 세계평화의 문은 올림픽공원과 도시가 만나는 접점이기도 하고 테헤란로의 흐름이 마무리되는 시각적 종점이기도 하다.

한국의 전통적인 문과 비상하는 처마를 연상시키는 ‘세계평화의 문’. 올림픽공원과 도시가 만나는 접점이기도 하다.

세계평화의 문 설계는 우리나라 근대건축을 대표하는 김중업이 맡았다. 그와 함께 근대건축의 대가로 꼽히는 김수근이 주경기장을 비롯해 올림픽공원 내 대부분의 경기장을 설계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김중업에게 세계평화의 문 설계는 반드시 끝내고 싶은 작업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1985년 현상설계 당선 이후 전두환 대통령이 상징성 부족이라는 감상평을 내놓으면서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일단 당선작 선정 한 달 후 현상설계 백지화 발표가 났다. 그다음 김중업과 당선자 중 한 명이었던 조각가 김세중에게 합작품을 만들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둘은 제안을 거부했고 결국 김중업이 제출한 원안의 크기를 높이 24m에서 91m, 너비 70m에서 91m로 키우기로 했다. 하지만 안전성 문제가 제기되면서 높이 32m, 너비 45m로 세 번째 설계 변경이 이루어졌고, 착공 후 1년이 지나 높이 24m, 너비 62m로 다시 바뀌어 준공됐다. 세계평화의 문 디자인이 변하는 동안 상징성 부족을 지적했던 대통령은 바뀌었고 설계자 김중업은 세상을 떴다. 그나마 최종 설계가 원안에 가까워진 점은 다행이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올림픽이 끝난 후 각 도시가 올림픽 시설들을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를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고 재정난과 시설 유지의 어려움 때문에 올림픽 유치를 꺼리는 나라에 참고할 만한 활용 방안을 제공하고 있다. 서울은 IOC가 올림픽 시설 활용의 모범 사례로 꼽는 다섯 곳 중 하나다. 서울 올림픽 때 사용했던 30개 시설 중 28개는 여전히 쓰이고 있다. 이는 하계올림픽을 개최했던 도시 중 최고 수준이다.

연간 500만명, 하루 1만4000명의 방문자가 올림픽공원에서 기대하는 건 올림픽의 의미와 몽촌토성의 역사적 가치만큼이나 빡빡한 서울에 있는 대규모 공원으로서 역할이다. 올림픽공원이 그 역할을 충실히 했기에 IOC가 선정한 모범 사례도 될 수 있었다. 올림픽공원의 시작이 올림픽을 위한 시설을 만드는 일이었지만 앞으로 필요한 건 시설보다는 여가와 휴식을 위한 시민들의 장소다.

 

방승환 도시건축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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