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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꽃의 비밀''…일본 ''낙화의 미학'' 희생으로 조작

''메이지'' 이후 군국주의자들 변용…가미카제대원 사쿠라 꽂고 출정

◇태평양전쟁 당시 만 18세의 가미카제 특공대원 우메자와 가즈요. 군복에 사쿠라를 꽂고 출전 직전에 찍은 사진.
너와 나는 동기 사쿠라

같은 훈련소의 연병장에 피어

한번 핀 꽃이라면 지는 것을 각오했다

멋지게 지자꾸나, 나라를 위해

(중략)

너와 나는 동기 사쿠라

서로가 멀리 떨어져 진다고 해도

사쿠라의 수도 야스쿠니 신사

봄 가지에 피어 다시 만나자.

―1938년 작곡된 일본 군가 ‘동기(同期)의 사쿠라’ 중에서

군가 ‘동기의 사쿠라’에서 보듯, 벚꽃은 ‘죽음’과 ‘산화(散華)’를 떠올리는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이었다. 사쿠라(벚꽃)는 또 사무라이(무사계급의 구성원)가 활보하던 시절 ‘할복’을 상징하기도 했다. 그런 역사 속에서 벚꽃은 곧 절대 충성과 희생이라는 ‘일본의 정신’이었다. 이 때문에 공식 국화는 아니라고 하지만, 벚꽃은 사실상 일본의 ‘나라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일본문화원 스기야마 도모쓰구 공보담당관은 “사쿠라를 국화로 지정한 법은 없지만, 일본인들은 관습적으로 사쿠라를 나라꽃으로 여기고 있다”고 밝혔다.

태평양전쟁(1941∼45년) 당시 미군 함대에 전투기를 몰고 투신했던 가미카제(神風) 특공대원들은 가슴과 어깨에 벚꽃 가지를 꽂고 임무를 수행했다. 어린 여학생들은 벚꽃 가지를 흔들어 사지로 향하는 이들을 배웅하며 용감무쌍함을 예찬했다. 1870년에서 1943년 사이 일본군 휘장에 꽃과 잎, 가지가 주요 모티브로 사용될 정도로 벚꽃은 일왕과 국가를 위한 희생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대표적 상징물이었다.

본래부터 벚꽃에 이런 군국주의의 이미지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난해 만났던 님 그리워하네 벚꽃 그리워 마중 나왔음에”(만요 8권), “다유라키 산봉우리 드높이 벚꽃 피는 봄이면 그대 더더욱 그리워지네”(만요 9권), “봄 안개 자욱한 미카사 산에 달님 나왔네, 사키산 피는 벚꽃 보고 싶어라.”(만요 10권)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노래집인 만요슈(萬葉集)에 실린 작품에는 꽃의 아름다움과 사랑하는 이에 대한 그리운 정서만이 배어 있을 뿐이다. 명지대 최경국 교수(일어일문학)는 “일본 고전문학에서 벚꽃은 일본인에게 친근한 꽃이자 단지 감상의 대상이었고, 눈(雪)과 가장 많이 비유됐다”고 말했다.

헤이안 시대(794∼1185년) 이후 일본에서는 꽃이라고 하면 벚꽃을 지칭하게 됐고, 현대적인 ‘벚꽃놀이’(花見:하나미)와 관련된 문학작품도 많아졌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벚꽃은 아름다운 ‘꽃’ 그 자체에 머물러 있었다.



◇가미카제 특공대 출격 때 사쿠라 가지를 흔들며 전송하는 일본 고등여학교 학생들(1945년 4월). 사진:출판사 모멘토(‘사쿠라가 지다 젊음도 지다’ 출간) 제공

그러나 ‘꽃’으로서의 사쿠라는 일왕 친정 형태의 통일국가가 형성된 근대 일본의 정치·사회적 변혁인 메이지유신(1868) 이후 서서히 변용되기 시작했다. 이 같은 변용의 한가운데에는 군국주의자들의 상징 조작이 있었다는 지적이다.

군국주의자들이 벌인 벚꽃의 이미지 변용은 “꽃은 벚꽃이요, 사람은 무사”라는 말에서 드러나듯 주저함 없이 순간적으로 지는 아름다움으로, 주군을 위해 목숨을 기꺼이 버리는 쪽으로 모아졌다.

광운대 이향철 교수(일본학)는 “메이지유신을 계기로 예로부터 일본인들에게 친근한 꽃이었던 벚꽃에 부국강병과 대외 침략의 희생을 미화하기 위한 대대적인 이미지 조작이 가해졌다”면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활짝 피었다가 순식간에 지는 벚꽃에 담긴 ‘낙화의 미학’을 확대 재생산하기 시작했고, 2차대전에서는 전사(戰死)를 미화하려는 유력한 상징으로 그 위력을 발휘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 당시 아시아 여러 민족에게 가슴 아픈 기억이 돼 버린 벚꽃은 현대를 살아가는 상당수 일본인들에게 감상하는 ‘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최 교수는 “일본 국민에게 벚꽃은 그냥 아름답기 때문에 즐기는 꽃일 뿐”이라며 “과거의 군국주의와 같은 이데올로기적 요소는 배제돼 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고 군국주의의 이미지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 교수는 “군국주의의 상징물로 악용된 벚꽃의 이미지를 잊은 채 꽃놀이를 즐기는 일본인들에게는 문화적으로 청산되지 않은 벚꽃에 대한 반성의 기미를 찾아볼 수 없다”며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집권 이후 일본의 우경화 경향이 두드러지면서 벚꽃 붐이 다시 일고 있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곰곰히 생각해 볼 때”라고 말했다.

실용적으로 이용한 한국

한국인들에게도 벚꽃 구경은 이제 자연스런 문화다. 하지만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대체로 “일제가 을사조약 이후 ‘사쿠라’를 서울 도심부터 전국으로 심어 정서의 일본화를 꾀했다”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

일본이 조직적으로 한반도에 보급하기 전만 해도 우리 민족이 벚꽃을 보는 시각은 달랐다. 유희의 대상보다는 ‘실용성’에 초점을 맞췄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고려사 등 각종 기록과 고전에는 매화, 복숭아, 살구 등 수많은 나무가 등장하지만 정작 벚나무는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선조들이 벚나무 껍질을 벗겨 활의 재료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실제 벚나무는 재질이 치밀하고 말라도 비틀어지지 않아 가구재나 건축 내장재로 요긴하게 쓰인다.





◇천연기념물 제38호인 전남 구례군 화엄사 올벚나무. 병자호란 이후 인조가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활 재료로 심게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국립수목원 생물표본연구실 이유미 연구관은 “화엄사 올벚나무나 정릉 주변 수양벚나무 등은 활을 만들기 위한 것으로, 감상이 아니라 부국강병이 목적이었다”고 말했다. 천연기념물 제38호로 지정된 전남 구례 화엄사의 올벚나무는 병자호란(1636) 이후 인조가 오랑캐에게 짓밟힌 기억을 되새기며 전쟁에 대비하고자 심게 한 것으로 전해진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려팔만대장경 경판도 벚나무 목재로 깎았다. 옛날 우이동 계곡에도 벚나무가 많았다고 전해진다. 조선 효종이 북벌을 계획하면서 궁재(弓材·활재료)로 쓰기 위해 이곳에 대규모 벚나무 숲을 조성했다는 학설이다.

악기 재료로 쓰인 기록도 나온다. 조선시대 음악 지침서인 악학궤범에는 “나무의 잎사귀를 말아서 풀피리를 만드는데, 지금은 벚나무 껍질을 쓴다”고 적혀 있다.

벚꽃이 그 화사함에도 사랑을 받지 못한 것은 활짝 피었다가 곧 지고 마는 다소 경박한 특성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꽃을 사랑하면서도 은근함을 미덕으로 여기는 우리 민족이 추위를 견뎌내고 피어나는 매화를 선호한 것도 이 같은 민족 정서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광복 이후 군사독재정권 시절 ‘낮에는 야당, 밤에는 여당’ 행세를 하는 이를 ‘사쿠라’로 부른 것도 벚꽃의 특성을 빗댄 한국적 변용이다.

역사 기록이나 전통적으로 꽃을 사랑하는 민족성에도 불구하고 선조들이 벚꽃을 두고 시 한 수나 전설 하나 남기지 않은 것 자체가 국민들로부터 소외받았다는 증거인 셈이다.

특별기획취재팀=류순열·김기동·신동주·박종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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