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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 속의 남미-한국화가 4인의 화첩기행] <3>페루(하)

'하늘아래 첫 호수' 티티카카호, 그곳서 신화를 보다

◇호반의 도시 푸노에서 바라본 티티카카 호수. 하늘빛과 물빛이 어우러진 색채가 마음마저 빼앗는다.
남미여행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을 꼽으라면 역시 페루의 티티카카 호수였다. 물론 이구아수 폭포나 마추픽추같이 자연의 거대함과 이에 맞선 인간의 힘이 빚어낸 다른 여타 지역의 풍경도 머릿속에 많이 남아 있지만 티티카카 호수에서의 1박2일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티티카카 호수의 여행은 호반의 도시 푸노의 조그만 선착장에서 출발하는 20인승의 작은 배에서 시작되었다. 배로 30분 거리의 우로스섬에 내리니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인디오들이 반긴다. 해맑은 웃음이 호수의 맑은 물을 닮았다. 우로스는 ‘토르토라’라는 갈대를 겹쳐 쌓은 섬이다. 400명도 채 안되는 주민들은 물고기와 물새를 잡거나 감자를 재배하며 생활을 영위해 나가고 있다. 정복자들에 의해 자신들의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 호수 한가운데 정착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일설에는 잉카시대 천민들이 쫓겨다니다가 이곳에 정착했다는 얘기도 있다. 어찌됐건 그들의 얼굴에선 산사에서 오랜 수행을 해온 선사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과연 어떤 삶이 행복한 삶일까, 우리 일행에게 화두를 던지는 듯하다. 우리는 어디로 달려가고 있는 것일까. 무엇을 위해 달려가고 있는 것일까. 푸른 호수에 가슴을 던졌다. 

다시 배를 타고 4시간 정도 소요되는 아만타니 섬으로 향했다. 배 위에서 바라본 높고 푸른 하늘과 넓고 푸른 호수는 깊은 사색에 잠기게 한다. 그동안 바쁜 여행일정과 단체 행동이라는 여행 특성상 가져보지 못한 호젓한 시간을 배 위에서 만끽해 본다. 조용히 나를 돌아보는 여행, 이것이 진정 내가 바라던 여행의 참 모습이었다. 나의 미래, 나의 가족, 나의 작업 등등 많은 반문과 반성, 그리고 새로운 결심을 하게 하는 시간들이었다.
◇갈대로 만든 가옥과 오리 모양의 전망대가 이색적인 우로스섬.

호수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작은 섬들을 뒤로하고 아만타니섬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원주민 집에 민박을 잡았다. 꼬불꼬불 언덕길 동네 풍경은 마치 우리의 60년대를 연상케 한다. 감자와 옥수수, 보리로 만든 수프가 점심식사로 나왔다. 소박하지만 여행 중 먹어본 어느 음식보다 맛이 있다.

아만타니섬 한가운데에 위치한 해발 4000m의 산에 올랐다. 저만치서 인디오 부부가 감자밭에서 일을 하고 그 옆에선 아기가 놀고 있다. 편안함을 주는 한 폭의 풍경화다. 섬 전체가 해발 3850m에 위치해 때로는 심장에 압박감이 느껴진다. 멀리 보이는 설산과 함께 더할 나위 없이 푸른 하늘과 호수의 물과 주변 풍경이 어우러져 그 자체가 그림이다. 한창 축제기간이라 음악에 취한 리듬이 거리를 채운다. 단순한 리듬의 반복은 최면으로 이어지고 사람들은 술에 취해 간다. 사람들은 아침부터 삼삼오오 술병을 들고 섬 중심에 위치한 아르마스 광장으로 몰려든다. 술 냄새가 진동한다. 깨어진 술병들과 비틀거리는 그들, 그렇게 축제는 일주일 동안 계속된다고 한다. 그들은 어쩌면 그렇게 해서라도 삶의 찌꺼기들을 걸러내고 있는지 모른다.

아쉬운 아만타니섬에서의 1박을 뒤로하고 40분 거리에 있는 섬 탈킬레로 향했다. 160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섬이다. 땅을 6구역으로 나눠 구역마다 매년 다른 농작물을 심는 농경방식과 공공사업을 평등하게 시행하는 시스템 등 잉카시대의 유산이 아직도 남아 있는 곳이다. 섬사람들이 짜는 직물은 하나의 예술작품이다. 하늘, 호수, 초목색을 녹여 낸 색채와 디자인 감각은 예술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해준다. 그동안 배웠던 색에 대한 고정관념이 무너져 버린다. 털실로 만든 수공예품은 직물의 정교함이나 무늬, 색의 배합 등이 놀라울 따름이다.

재미 있는 결혼 풍습도 눈길을 끈다. 총각이 마음에 드는 처녀가 있으면 작은 거울로 햇빛을 반사시켜 마음을 전한다. 이때 큰 수술이 달린 검은 망토를 쓰고 다니는 처녀들이 남자를 향해 수술을 흔들면 OK 사인이 된다.

탈킬레 남자들은 모두 모자를 쓰고 있다. 모자의 무늬와 색깔 하나하나에도 다 의미가 있다. 총각은 밑에는 빨간 계열의 무늬에 흰색 모자를, 유부남은 전체가 빨간 무늬의 모자를 쓴다. 남자가 결혼할 즈음엔 손수 이 빨간 문양의 모자를 뜨개질해서 준비한다고 한다.
◇김경화 작가가 그린 티티카카 호수.

소박하면서도 여러 가지 색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작은 집들과 살림살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가축들과 어린아이들이 뛰어노는 탈킬레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특히 섬 중간에 위치한 길에서 바라본 티티카카 호수는 장관이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호수 티티카카. 직접 와보지 못했더라면 티티카카는 나에게 이런 지리적 의미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내가 직접 겪은 티티카카는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호수라는 명성보다는 그곳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자신들의 전통을 유유히 지켜 내려오는 인디오들을 따뜻하게 품고 있어 더 아름다웠다.

호수 주변엔 잉카문명 이전에 존재했던 티와나코 문명의 고대 유적이 산재해 있다. 수중에선 티와나코 문명의 사원 유적이 확인되기도 했다.

티티카카 호수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우리 일행은 볼리비아로 가기 위해 볼리비아 영사관에 비자를 신청했다. 비자 발급까지 꼬박 이틀이 걸린다니 티티카카 호반의 도시 푸노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바쁠 게 없는 이들에게 순응하는 도리밖에 뾰족한 수가 없었다. 여행을 하면서 그것도 머나먼 남미여행에서 처음으로 지루함을 느낀 시간이었다. 호텔 입구에서 동전 벽치기로 오전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시내를 배회하기도 했다.

저녁 때에는 호텔 근처 레스토랑에서 페루의 전통 춤과 민속 음악 공연을 관람했다. 페루맥주의 취기에 의존해 조금은 생소한 페루 음악의 열기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런 와중에도 박병춘 화백이 스케치북을 꺼내 악사들을 담는다.

공연이 무르익을 무렵, 박병춘 화백이 콜라를 시켜 웨이터에게 컵 두 개를 놓고 똑같은 양으로 나누게 했다. 웨이터는 신중하게 콜라를 두 잔에 똑같이 따라놓고 김범석 화백에게 “마담, 드세요!” 하는 것이다. 그 웨이터는 머리가 긴 뒷모습을 보고 박병춘 화백의 부인으로 오해를 한 모양이다. 일순간 레스토랑은 한바탕 웃음으로 가득했고 우리는 여행에서의 작은 에피소드를 갖게 되었다.

그렇게 페루 푸노에서의 시간을 보내고 우리는 다음 여행지인 우유니 소금사막과 형형색색의 호수와 사막 지프 투어가 기다리는 볼리비아로 향했다.

글·사진=이만수, 김범석,

박병춘, 김경화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