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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 단막극제’에서 걸작을 만날 확률

영화계에 ‘영화오래보기 대회’가 있다면, 연극계에는 ‘신춘문예 단막극전’이 있다. 두 행사 모두 오랜 시간 동안 한 자리에 앉아 상당한 수의 작품을 봐야 한다. 기자는 24일, 2011 신춘단막전이 열리는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 착석해 8편의 연극을 하루만에 보고 왔다. 연극은 오후 3시부터 시작해서 밤 10시가 넘어 막을 내렸다. 대략 7시간을 연극 안에서 숨 쉬고 온 하루였다.

한국공연예술센터와 한극연극연출가협회가 공동 주최하는 ‘신춘문예 단막극제’는 매년 각종 일간지에 당선된 신춘문예 작품을 무대화하는 사업이다. 2011년에는 경상일보에서 새로이 신춘문예 희곡작품을 선별, 총 8편의 연극이 무대에 올랐다.

◆ 많은 관객을 장악하겠다. <크리스마스에  … ><아빠들의 소꼽놀이>

부산일보 ‘크리스마스에 삼십 만원을 만날 확률’ ( 오세혁 작가 / 오동식 연출 )과 서울신문 ‘아빠들의 소꿉놀이’ (오세혁 작가 / 손정우 연출)모두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게다가 오세혁 작가는 일간지 두 곳에서 각기 다른 작품으로 당선돼 이번 행사에서 자신의 잔치판을 확실히 펼쳤다. 

일반인들의 시각에서 보면, ‘아빠들의 소꿉놀이’ 가 확실히 관객들을 끌어당긴다. 손정우 연출이 가세해 장면 분할 역시 상당히 깔끔하게 처리했다. 배경음악, 배우들의 목소리 톤을 잘 조절해 희곡의 느낌을 훨씬 감각적으로 살려냈으며, 희극과 비극이 절묘하게 조합된 ‘인생과 가족의 의미’ 역시 결코 가볍지 않게 불러왔다. 단, 참신함의 시각에서 볼 때 모든 게 너무 잘된 연극 공식 그대로를 따르고 있다는 점이 흠이라면 흠이다.

연극 매니아들 입장에서는 ‘크리스마스에 삼십 만원을 만날 확률’이 더 끌릴 수 있겠다. 연희단 거리패의 오동식 연출 및 배우들과 손 잡은 결과 똑같은 작가의 작품임에도 이 작품에서 연희단 거리패 냄새가 물씬 났다. 엄마, 아빠, 아들이 각각의 공간에서 전화로만 대화를 하는 상황, 간간히 야동에서 흘러나오는 신음소리 등을 가미해 장면 장면을 감칠맛 나게 그려냈다. 후반 각각의 공간을 뚫고 전화를 하는 상황, 상대의 공간에 찾아든 세 사람의 상황을 유기적으로 엮어 잔잔하게 극을 마무리 했다.

24일 관객들의 반응은 ‘아빠들의 소꿉놀이’ 가 더 좋은 듯 보였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에 끌렸다. 소통불가능한 가족들이 30만원 때문에 벌이는 속고 속이기 대작전 속에는 오세혁 작가의 따뜻한 인간애와 함께 이야기꾼 솜씨가 담겨있었다. 연희단 거리패의 '젊은 피'인 김지훈 작가 이래 또 다른 신인 오세혁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깊이감으로 승부하겠다. <돌고래가 나오는 꿈><목소리>

한국희곡작가협회 ‘돌고래가 나오는 꿈’ (이해주 작가 / 손규홍 연출)은 제목 그대로 한 편의 꿈 같은 연극이었다. '인간의 소통이나 진실'에 대한 내용 자체보다는 장면 장면을 관객들로 하여금 사유하게 만드는 힘이 강한 작품이다. 곳곳에 영화 패러디, 언어유희를 배치해놓거나, 사이비 의사같은 배우 정충구의 출현으로 객석에서 웃음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효과음과 조명 역시 잘 사용해서 몽환적인 느낌 역시 풍겼으며 노교수 역 원근희의 연기력 역시 눈에 들어왔다. 다만, 극 속에서 며느리와 손녀의 존재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점은 아쉽다.

동아일보 ‘목소리’(방동원 작가 / 황동근 연출)는 김광석의 쓸쓸한 노래 ‘거리에서’가 흘러나오는 마지막 무대 연출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무대 전환 초반부터 신나는 음악과 댄스로 관객들을 사로잡더니 마지막 역시 음악으로 막을 내렸다. 불법체류 노동자 시논과 공장 사장과의 대화가 극 전반을 차지하는 이번 희곡은 연극으로 넘어오면서 한층 힘을 얻었다. 골프 채가 바닥을 치는 소리, 족발 뼈와 잃어버린 시논의 손가락이 겹쳐지는 이미지 역시 인상적이었다. 그럼에도 중간 중간 집중력이 떨어지는 점은 어쩔 수 없었다. 사장과 시논의 이야기 강약이 연극 속에서 제대로 살아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 나만의 스타일이 있다. <자유로울 수는 없나요?><One more Time>

전남일보 ‘자유로울 수는 없나요?’ (최명식 작가 / 김도훈 연출)는 직설적으로 말하면 난해한 작품이고, 보다 정제된 언어로 말하면 작가 자신만의 스타일이 확실한 작품이었다. 최명식 작가의 수상소감을 찾아보니 역시, 연극 쪽에는 실제 경험도 미비하고 관극도 부족하다고 적혀있었다. 철창이 없는 희한한 감옥을 우리가 사는 세상으로 치환해 ‘기억’의 유무에 따라 달라지는 여러 인생을 보여주며 관객들의 머리에 쥐가 나게도 만들었다. 작가의 제목을 패러디하자면, ‘우리가 아는 연극 틀을 벗어나 보다 자유로울 수는 없나요?’하고 말하고 있는 연극이기도 했다.

경상일보 ‘one more time’ (배진아 작가 / 백은아 연출) 역시 신진 작가의 에너지가 가득한 작품이었다. 백은아 연출은 이 작품을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인연과 헤어짐, 그리고 그것들이 남긴 상처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했다. 직접 관람한 결과 꿈과 희망이 있는 미라클 월드와 그 곳에 자리한 미아 보호소, 태어날 부모 보기, 추위에 떨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소녀가 나오는 '성냥팔이 소녀' 책 등 언뜻 언뜻 비치는 장면 장면으로 기본적인 정보는 머릿 속에 들어오나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가닥은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연극이었다. 또 다른 한편으론 서선자의 안무가 가미 돼 무용같은 연극 분위기도 느낄 수 있었다.

◆ 2명 배우로 승부한다. <확률><사랑이라고 부르는 것>

한국일보 ‘확률’ (김성배 작가 / 문고헌 연출)는 희곡과 달라진 부분이 우선 눈에 들어왔다.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에 차 사고를 당한 남녀가 등장해서 목소리 톤을 달리하고 천사 마크를 머리에 다는 장면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 결과 사고 당사자 남녀가 (벤치에 앉은 두 남녀가 자신들을 두고 벌이는) 이야기를 구조되기 전까지 차 안에서 듣고 있었다는 느낌도 줄 수 있었고, 결국은 벤취 남녀도 사고 난 연인과 별반 다르지 않았음을 극 속에서 드러냈다. 그러나 그 외에는 연출의 힘이 느껴지지 않아 희곡에서 느꼈던 언어의 힘이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다소 밋밋하게 막을 내린 점이 아쉽다.

조선일보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 (김슬기 작가 / 박원경 연출)은 연극으로 오면서 희곡의 쿨한 느낌이 확 줄어들어 정말 아쉬운 작품이었다. 사실, 김슬기 작가의 희곡 자체도 재미있었고, 다른 작가들과 달리 유달리 극장 주변을 계속 왔다갔다 해 기자 눈에도 들어왔다.  자신의 첫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신진 작가들이 보이는 긴장감과 기대감 역시 그녀의 얼굴에서 감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막상 무대에 오른 연극은 어째 ‘신선할 때 먹어야 제 맛인 회를 하루 지나서 손님한테 내 보인 꼴’이었다. 여자 역 배우의 목소리 톤이 다소 안정적이지 못한 채 뭔가에 쫒긴 채 대사를 치고 있다는 느낌을 준 점부터 매력이 반감되기 시작하더니 연출의 힘 역시 전혀 느낄 수 없었다. 희곡에서 느낄 수 있었던 감각적이고 리드미컬한 대사들은 어디로 갔는지 머릿 속이 아리송 할 뿐이었다. 비슷한 소재의 '극적인 하룻밤'이나 '그 자식 사랑했네'라는 작품을 기대하고 온 관객이라면 다소 실망감이 앞섰을 것으로 보인다.

초보작가들이 벌이는 [신춘문예 단막극제]에서 걸작을 만날 확률은 그리 높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신선하고 따끈따끈한 작품을 내가 먼저 볼 수 있을거란 기대감에 자꾸 발걸음을 하게 된다. 한 무대에서 8 작품을 보여줘 순식간에 무대를 뜯고 새로 무대를 만드는 과정 역시 그대로 노출한다. 그 결과 1분내지 5분 안에 후딱 새로운 세상이 만들어지는 무대를 보는 잔재미도 빠뜨릴 수 없다.

이 번 축제에서 만난 <크리스마스에  … ><아빠들의 소꼽놀이>는 곧 대학로 무대에서 다시 볼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돌고래가 나오는 꿈><목소리>는 수정과 보완을 거치면 보다 많은 관객들을 장악할 듯 보였으며,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은 새로운 연출과 배우가 가세해 보다 감각적으로 만들어낸다면 장기공연이 가능할 거란 예감이 들었다.

공연전문기자 정다훈(otrcoolpe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