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47) 삶이라는 주사위놀이 우리 삶은 ‘신들의 주사위 놀이’처럼 영원회귀 입력 2012-02-12 16:31:45, 수정 2012-02-12 17:27:03 자, 니체 철학의 핵심으로 들어가자. 니체에 따르면, 우주 만물은 영원히 회귀한다. 만물은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다시 똑같은 것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영원한 반복, 그게 숨결을 받고 태어난 사람이 떠안은 불가피한 운명이다. 차라투스트라가 이 세상에 온 목적도 바로 이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를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했다.
니체는 서양 가치체계와 형이상학의 기반이 되었던 기독교보다 불교가 “백배나 더 냉정하고 진실되고 객관적”인 종교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기독교보다 불교에 대해 더 우호적이었다. 니체는 불교를 동양의 허무주의를 집약하고 있는 종교, 수동적 허무주의의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형식으로 이해했다. 그러면서 불교에서 서구 세계가 빠져 있는 수동적 허무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능동적 허무주의의 가능성을 동시에 보았다. 그러나 모든 ‘허무’는 본질에서 무로 귀착되며, 그런 까닭에 불교가 “아시아적 평온과 관조”(‘아침놀’)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삶에의 능동적 의지, 생성에의 열망을 누르고 부정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불교는 노년의 인간을 위한, 쉽게 고통을 느끼는 호의적이고 부드럽고 지나치게 정신적이 되어버린 인간종을 위한 종교이다(유럽은 아직 불교를 받아들일 정도로 성숙하지 못하다).” 그러면서도 불교가 현실도피적 허무주의라는 한계에 갇혀 있다고 통찰한 뒤에 불교를 “문명의 결말과 권태를 위한 종교”(‘안티크리스트’)라고 말한다. 불교에서 윤회는 벗어나야 할 업(業)이고 고(苦)다. 윤회의 사슬을 끊고 거기에서 자유롭게 될 때 비로소 해탈에 이른다. 니체의 영원회귀는 해탈을 배제한다. 불교에서 업과 고에서의 해방으로 이해하는 열반조차도 현실도피주의의 한 방식, 즉 “동양적 허무로 은둔함”(‘즐거운 학문’)으로 보았다. 니체에게는 영원회귀는 그 자체로 만물의 운명이고 목적이다. 돌아오는 것은 무엇인가? 오해하지 말자. 그것은 동일자의 회귀가 아니다. “되돌아옴 그 자체는 그것이 자신을 생성으로, 지나가는 것으로 긍정하는 한에서 존재를 구성”하고 “영원회귀 속의 동일성은 되돌아오는 것의 속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차이 나는 것을 위해 되돌아오는 상태”(들뢰즈, ‘니체와 철학’)를 가리킨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 긍정하는 게 운명애(아모르 파티 amor fati)다. ![]() 왜 탁자가 요동하고 갈라지고, 갈라진 틈들은 불을 뱉어 냈던가? 다수와 우연을 끓이기 위함이다. 들뢰즈는 이렇게 설명한다.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듯이, 다수와 우연은 익히고 끓인 경우에만 좋은 것이다. 끓이고, 불을 지피는 것은 우연을 파괴하는 것도, 다수 뒤의 하나를 발견하는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솥 안에서의 비등은 놀이꾼의 손 안에서 주사위들의 부딪침과 같고, 다수나 우연을 긍정으로 만드는 유일한 방식으로 보인다. 그때 던져진 주사위들이 주사위 던지기를 한 번 더 하게 하는 수를 만든다. 주사위 던지기를 한 번 더 하게 할 때 그 수는 우연에 다시 불을 지피고, 우연을 다시 익게 하는 불을 유지시킨다. 왜냐하면, 수는 존재, 하나, 필연성이지만 다수 그 자체를 긍정하는 하나이고, 생성 그 자체를 긍정하는 존재이며, 우연 그 자체를 긍정하는 운명이기 때문이다.”(들뢰즈, 앞의 책) 우리의 삶은 신들의 주사위놀이다. 주사위를 던졌을 때 나오는 숫자는 어떤 인과성에도 종속되지 않는다. 그 숫자는 오로지 발랄한 우연에 따를 뿐이다. 그것은 우연의 원리에 의해서 비롯되지만 불에 덥혀지고 익으면서 필연으로 긍정된다. 차이를 나타내는 우연성의 출현 자체와 그것의 영원한 회귀가 존재 생성의 원리이기 때문에 우연은 불가피하게 필연으로 긍정될 수밖에 없다. 지금 살아 있는 우리는 살아 있고 앞으로도 살아나갈 것이다. 삶은 다시 한번, 그것이 아무리 치욕과 권태로 물들어 있다 하더라도 수없이 여러 번 살아야 하는 그 무엇이다. 주사위놀이는 끝나지 않는다. 존재 하나하나는 이미 하늘 위에 던져져서 땅에 떨어진 주사위다. 주사위에 새겨진 숫자는 우리들의 차이로 실현된 영원히 반복되는 운명의 표상이다. 주사위 던지기에 결정된 운명 속에서 이성의 거미줄에 의해 포획되지 않는 우연은 춤춘다. “오, 내 위에 있는 하늘, 순수하고 고귀한 하늘! 지금은 내게 바로 너의 순수성은 영원한 거미도, 이성의 거미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너는 신성한 우연들이 춤추는 마룻바닥이며, 너는 주사위들과 놀이하는 신들을 위한 신성한 탁자니라……”(‘해뜨기 전에’) 대지 위에 떨어진 당신의 주사위 숫자는 몇인가? 우연을 환영하고 우연을 긍정하라! 왜냐하면 당신은 신성한 우연들이 춤추는 마룻바닥이며, 신들을 위한 신성한 탁자이기 때문이다. ●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진은영, ‘니체,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 그린비, 2007 ·이진우, ‘니체, 실험적 사유와 극단의 사상’,책세상, 2009 ·김진, ‘니체와 불교적 사유’, 울산대학교 출판부, 2004 ·질 들뢰즈, ‘니체와 철학’, 이경신 옮김, 민음사, 199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