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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현 기자의 대중과 소통하는 학자들](18)학문공동체 연구기관 ‘수유너머’ 고병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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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02-01 15:29:44 수정 : 2010-02-01 15:2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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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과 삶의 일치’ 주창하는 ‘권력없는 추장’
◇고병권 대표는 “앎과 삶이 일치된 노동자와 농민은 이웃과 더불어 산다”며 “같은 이치에서 교수 등 지식인도 앎과 삶을 일치할 때 대중 속에 당당히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전신 인턴기자
태평양 주변의 섬들은 서경 180도를 기준으로 구분된다. 기준선 오른쪽은 폴리네시아, 왼쪽은 미크로네시아(북반구)와 멜라네시아(남반구)다. 이웃한 이들 지역에서 리더십과 관련해 재미있는 현상이 발견된다. 그 현상은 ‘빅맨’으로 표현되는 집단의 최고 어른의 행동에 큰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폴리네시아에서는 빅맨이 확실한 대우를 받는다. 그곳에서는 빅맨의 개인적인 일이 최우선이다. 구성원들이 빅맨의 일을 돕고, 시간이 남을 때야 자신들의 일을 한다. 그러나 멜라네시아는 정반대 일이 펼쳐진다. 구성원들의 경작지가 먼저 고려되는 것이다. 빅맨도 구성원들의 일을 다 끝낸 뒤에야 자신의 경작지를 챙긴다.

이는 프랑스의 정치인류학자 피에르 클라스트르가 발견한 두 곳의 차이점이다. 태평양을 공유하고 있는 두 군도에서 최고 어른의 지도력이 이렇게 확연히 차이를 드러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리더’에 대한 ‘생각의 차이’가 이렇게 표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리더는 권력자가 아니라 함께하는 사람

현대사회에서는 최고의 리더는 권한을 갖고 개인적인 이득을 추구할 수 있다는 인식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우리의 인식이 잘못됐다는 데에 방점을 찍는 학자가 있다. 학문공동체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고병권 대표가 그렇다. 그는 “‘리더는 항상 권력을 갖고 있다’는 생각은 잘못됐다”고 강조한다. 대중과 소통하는 현장 리더의 발언이기에 공감의 깊이가 깊다.

어느때보다도 정치권의 리더십 실종을 절감하는 시점에서 고 대표를 만났다. 고 대표는 우리 사회의 ‘잘못’을 진단하며 시대의 담론을 내놓는 대표적인 진보주의 학자이다. ‘젊고 진보적인’ 그는 때로는 사회학자로, 때로는 철학자로 우리 사회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해 낸다.

주변에서는 그를 대표보다는 ‘추장’으로 부른다. 그도 그렇게 불리는 편을 선호한다. 스스로 멜라네시아의 빅맨처럼 수유너머의 권력 없는 리더이자 봉사자라고 여긴다. 이 글에서도 그의 뜻을 살려 ‘고 추장’으로 부른다.

수유너머는 대중과 연구하는 지식인이 만나는 최적의 장소이다. 서울 강북에서 활발히 인문학과 철학을 공부하던 ‘수유’와 ‘서사연’ 두 공부모임이 뜻을 합해 수유너머를 탄생시킨 게 벌써 10년이 다 됐다. 연구모임은 그동안 수유리에서 종로를 거쳐 해방촌에 공간을 마련했다. 얼마 지나지 않으면 또 이사해야 하지만 60명 구성원은 이곳을 가장 편안하게 여긴다. 맘껏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는 묵직한 주제를 담은 저작물이 쏟아져 나온다.

#지식인의 생명은 현장성

고 추장도 최근 ‘추방과 탈주’(그린비)를 내놓았다. 두 개의 키워드를 설명하며 우리 사회의 과거를 분석하고 미래를 진단했다. 첫 키워드는 추방. ‘추방’은 외환위기 이후 지난 10년간 우리 사회에서 일어난 현상을 설명한다. 고 추장은 “추방은 권력과 그 주변이 대중에게 자행한 모든 일을 드러내는 핵심적인 단어다”고 강조한다.

“지난 10년은 대중이 추방돼 온 기간이었습니다. 직장인이 노숙자가 되고, 졸업생이 백수가 되는 추방 소식이 연일 뉴스를 장식했잖아요. 그렇게 추방돼 주변인이 된 대중은 생존 불안에 노출되는 악순환의 고리에 들어섰습니다. 권력과 자본은 불안한 대중을 비교적 손쉽게 통제하게 되는 것이지요.”

추방된 대중이 생존을 위해서 권력과 자본의 요구를 들어주게 된다는 설명이다. 많은 학생이 학문이나 실체적인 삶에 대한 갈구보다는 고시 준비에 내몰린 것도 그의 설명을 잘 풀어낸다. 철학자 들뢰즈가 제시한 개념어 ‘추방’을 통해 우리 사회를 분석한 셈이다.

그렇다면 두 번째 키워드 ‘탈주’는 어떻게 설명될까. 고 추장은 ‘탈주’는 앞으로 우리 사회에서 일어날 일이라고 예견한다. 점점 주변으로 몰린 대중은 새로운 가능성을 찾게 되는데, 추방된 이들이 찾는 공간이 ‘탈주의 공간’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중앙에서 추방된 ‘주변’은 새로운 가능성이 제시된다는 점에서 마냥 절망적이지는 않다.

대중이 주변으로 몰리고 추방되는 현실에서 대중과 함께 늘 현상을 고민해 온 학자는 어떤 처방을 내놓을까. 고 추장은 먼저 ‘지식인의 죽음’을 안타까워한다.

“현장이란 사건이 일어나는 곳이고, 실천이 이뤄지는 장이며, 운동이 펼쳐지는 곳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현장은 지식세계 외부를 지칭하는 개념이 아니지요. 그런데 다수 지식인이 현장성을 상실한 채, 정부 각료와 비슷하게 이론적인 시각만을 드러내 보인 경우도 있습니다.”

현장성을 상실한 지식인과 그 문화에 대한 단도직입적인 비판인 셈이다. 지식인의 현장성 상실은 그의 표현대로라면 ‘앎’과 ‘삶’이 단절돼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는 “우리 사회에서는 전공 분야의 일부 학자만이 ‘소소한’ 즐거움을 느끼는 글들이 발표되며 ‘앎’과 ‘삶’이 괴리돼 있다”며 “1990년대 이후에는 진보 지식인마저 현장성을 잃어 왔다”고 일갈한다.

같은 견지에서 그가 보기에 대학은 오래전부터 정보를 축적하는 장소로 변질됐다. 그렇다면 대학 본연의 역할 회복은 배움과 삶을 하나의 문제로 보고 이를 해결할 때 가능할 것이다.

“배웠다는 것은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깨닫는 것은 기존 사고의 질서가 깨지는 것이기도 한데, 이는 과거의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과정은 좁게는 배움의 과정이지만, 넓게는 해방의 과정이기도 하지요.”

#진정한 배움은 앎과 삶이 일치하는 것

깨닫는 것을 강조하는 학자로서 고 추장은 ‘가르친다’는 표현은 쓰지 않는다. ‘가르친다’는 말보다는 ‘배우게 한다’는 말을 좋아한다. 정보의 집합을 가공한 것으로는 결코 가르칠 수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배움은 깨달을 때만 일어난다는 게 그의 기본적 인식의 토대이다. 고 추장은 “현장에서 배움이 일어날지언정 삶에서는 가르치는 사람이 없다”며 “지식인들이 ‘남의 해방’을 걱정하지 말고 ‘자신의 해방’을 걱정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교도소의 재소자에게 인문학을 강의하는 활동은 그가 현장성을 경험하는 통로의 일부다. 고 추장의 강의를 들은 일부 재소자는 “‘악은 나쁜 생각이 아니라 ‘생각 없음’에서 나온다”는 말에 전율했다. 이 말은 유대인 학살 혐의로 재판정에 선 독일 나치스 친위대 중령이었던 칼 아돌프 아이히만을 보고 독일 철학자 해나 아렌트가 한 말이다.

그의 설명을 듣고 재소자가 밝힌 심정은 이랬다. “지금까지는 석방되면 어떻게 먹고살 것인가를 고민했는데,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게 됐습니다.” 현장성을 바탕으로 ‘앎’과 ‘삶’을 일치시키자 일어난 변화였다.

그러나 고 추장은 다시금 ‘지도’가 아니라 ‘함께하기’를 주문한다. 그가 즐겨 되풀이하는 문장은 무장 봉기를 이끈 멕시코 치아파스 원주민이 했던 말이다.

“만약 당신이 나를 도우러 여기에 오셨다면, 당신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여기에 온 이유가 당신의 해방이 나의 해방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라면, 그렇다면 우리 함께 일해 봅시다.”

bali@segye.com

■고병권 대표는…

1971년 전남 함평 출생.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대표.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대학원에서 ‘니체’와 ‘화폐’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공동체에서 하는 세미나와 강연, 저술, 강연이 그의 하루를 설명해 내는 핵심어다. 잘못된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식으로 국가와 권력, 자본에 대한 감시를 소홀히 하지 않고 있다. 철학자 니체와 들뢰즈는 그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는 대상이다.

▲저서

‘추방과 탈주’,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화폐, 마법의 사중주’, ‘고추장,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 등.

▲역서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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