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부고속도로 하행선 판교IC를 지나 동판교로 접어들 무렵 왼편의 낯선 풍경 하나가 시선을 잡아끌었다. 족히 수천평은 됨직한 공터였는데 널린 쓰레기로 보아 오랫동안 방치된 땅인 듯했다. 서울과 가깝고 입지여건도 뛰어나 ‘금싸라기 땅’소리를 듣는 판교에 무슨 이유로 이처럼 버려진 땅이 남아 있을까. 더 이상한 것은 오가는 사람 하나 없는 허허벌판에 지하철역까지 세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기현상은 인근 부동산시장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상가는커녕 노점상 하나 없는데도 인근 아파트는 초역세권으로 불렸고, 시세는 100㎡짜리가 8억원에 달했다. 행인 하나 없는 역세권과 황량하게 방치된 땅, 10억원에 육박하는 아파트촌. 이 같은 판교의 부조화는 무엇 때문인가.
“그땐 좋았는데”…부동산 거품의 그림자
이곳에 건설 중인 지하철역은 신분당선 판교역이다. 예정대로 오는 9월 개통된다고 하는데 문제는 주변 빈터였다. 이곳은 동판교의 핵심상업시설과 주거시설이 들어서기로 예정된 부지다. 당초 계획대로라면 지하철 개통시기와 맞물려 공사가 진행됐어야 하는데 사업이 중단된 상태다.
이곳의 땅주인은 한국토지주택공사(LH). 원래 성남 원주민들이 살던 곳인데 LH가 사들여 ‘알파돔시티’라는 프로젝트파이낸싱(PF) 개발사업을 2007년 시작했다. 토지를 조성한 뒤 민간사업자들을 끌어들이고 그곳에 주상복합아파트와 호텔, 상업시설을 갖춘 13만8000㎡(사업부지) 규모의 대형 복합단지를 짓겠다는 계획이었다. 당시는 부동산 거품이 절정이었고 사업 진행은 일사천리였다. 사업비가 땅값 2조3601억원을 포함해 5조671억원에 달했지만 판교 아파트 분양이 대박을 낸 직후라 너도나도 사업에 뛰어들었다. 공모를 통해 건설사 8곳 등 17개 투자자가 참여한 컨소시엄이 꾸려졌다.
일단 고금리 단기자금인 브릿지론을 동원해 땅을 사고, 공사자금은 개발이익이 생기면 돈을 갚는 조건으로 PF대출을 받아 조달키로 했다. 그러나 2008년 금융위기로 공사는 첫삽도 못 뜬 채 기약없이 멈춘 상태다. PF를 통해 조달키로 한 자금이 문제였다. PF는 향후 수익이 나면 갚기로 하고 빌리는 돈인데, 부동산 거품 붕괴로 수익성에 의문이 제기되자 돈을 빌리기 어렵게 된 것이다.
공사 지연으로 가장 곤란해진 건 총 32.7%의 지분을 갖고 공사참여 대가로 빚 보증을 서기로 한 건설사들이다. 특히 건설사 등은 공사가 중단되기 직전 땅값 6372억원을 치렀는데, 브릿지론을 쓰면서 화를 입고 있다. 이 돈은 3∼6개월마다 상환날짜가 돌아오는데, 원금과 이자를 갚지 못한 채 연장에 재연장을 하는 중이다. 최근엔 이마저도 버티지 못해 새로운 대출을 받아 빌린 돈 가운데 일부를 갚았다. 알파돔시티의 운명은 여전히 안갯속이다. 특히 땅 주인인 LH는 땅값부터 내놓으라는 입장이어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어려워 보인다. 사업에 참여한 대형 A건설사 관계자는 11일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난감하다”며 곤혹스러워했다.
빚을 내 빚을 갚다…PF부실 악순환
건설사들의 PF 부실 문제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과 같다. 저축은행들은 지난해 9월 말 기준으로 전국 369개 부동산 사업장에 모두 12조4000여억원의 PF 대출을 했는데, 연체율이 무려 24.3%에 달한다. 부동산경기 침체로 자금이 돌지 않으면서 건설사들이 저축은행에서 빌린 PF 대출 연체율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같은 기간 전체 금융권의 PF 대출액은 71조8000억원, 연체율은 12.84%로 나타났다.
이런 가운데 은행들이 경영 건전성 확보를 위해 PF 대출 회수에 나서면서 건설사들의 부도가 현실화하고 있다. 최근 들어서만 LIG건설 법정관리 신청, 월드건설 법정관리 신청, 진흥기업 부도위기, 동일토건 워크아웃 신청 등의 악재가 건설업계를 뒤흔들었다.
알파돔시티만이 아니다. 지난해 자금난으로 사업 좌초 위기를 겪은 ‘용산역세권개발사업’이나 건설사들의 무덤이 된 ‘양재동 파이시티 사업’ 등도 비슷한 길을 걸었다. 그나마 용산역세권개발사업은 최근 자산선매각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는 등 사업재개 조짐을 보이고 있지만 갈 길이 먼 상황이다.
멈춰버린 알파돔시티 건설사들의 자금 조달 문제로 공사가 중단된 성남시 분당구 ‘알파돔시티’ 사업부지. 수만평은 되어 보이는데 공터엔 오가는 사람 하나 없어 썰렁한 모습이다. 이희경 기자 |
가계빚의 덩어리는 워낙 크다. 신용대출을 포함해 전체 1000조원에 육박하는 실정이다. 부실화할 경우 경제 전체에 미칠 파장도 그만큼 클 수밖에 없다. 전체 금융권 PF연체율(12.84%)에 비하면 가계빚 연체율은 아직 위험한 수준은 아니다. 2009년 12월 0.48%에서 2011년 2월 현재 0.68%로 약간 높아졌을 뿐이다. 이 중 주택담보대출의 연체율도 같은 시기 0.33%에서 0.54%로 높아지는 데 그쳤다. 그러나 금리상승 기조에서 가계빚 폭탄이 터질 위험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처럼 부동산 빚에 발목 잡힌 가계와 건설사들의 처지는 부동산 불패신화가 낳은 ‘일그러진 한국 경제의 자화상’이다. 부동산 경기 침체가 이어지고 금리가 올라가면 금융권까지 동반 부실화하는 ‘한국판 서브프라임 사태’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김준모·이희경 기자 jmki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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