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적이 뜸한 도로에는 타다 만 쓰레기들이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꽤 오래 방치됐는지 쓰레기 위에는 잡초와 꽃도 피어 있었다.
지난달 16일 말레이시아 클랑에 방치된 폐기물에 누군가 불을 질러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폐비닐, 폐플라스틱이 녹으며 매캐한 냄새를 풍겼다. |
100m쯤 걸어가자 연기에 가려 보이지 않던 한 남성이 하던 일을 멈추고 기자를 응시했다. 경계를 풀기 위해 과장된 미소로 악수를 청하자 자신의 손이 너무 더러워 악수할 수 없다며 따라 웃는다.
이곳 주민인 라자 무함마드 빈씨는 매일 여기서 돈 될 만한 폐기물을 주워서 판다고 했다. 플라스틱은 ㎏당 1링깃(약 270원), 철은 4링깃 정도 받는다.
여기서 1시간 정도 쓰레기를 골라 담아 또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데 이렇게 두 군데서 모은 폐기물로 하루에 100∼150링깃을 번다. 말레이시아 50대 근로자 월평균 급여(2016년 기준 3610링깃)에 견줘 크게 떨어지는 수준은 아니다.
“나한테는 이 쓰레기가 다 돈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버리고 태우고, 버리고 태우는 일이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돼요.”
쓰레기 무단투기와 길거리 소각은 우리나라는 물론 말레이시아에서도 불법이다. 현지 방송국에서 이곳의 불법소각 문제를 보도한 적이 있는데 별다른 조치는 없었다고 한다.
말레이시아 서쪽 클랑 지역 주민인 라자 무함마드 빈씨가 지난달 16일 불법소각된 쓰레기 사이에서 돈 될 만한 폐기물을 찾고 있다. |
연기 속에 서 있은 지 20분 정도 지나자 살짝 어지럼증이 느껴졌다. 라자씨도 독한 연기가 괴롭다고 했다.
“연기가 건강에 나쁘다는 걸 잘 알고 있고, 빨리 죽을 수 있겠구나란 생각도 합니다. 하지만 제 집이 여기 있고, 여기서 쓰레기를 골라내는 게 제 일인데 어쩔 수 없잖아요.”
그가 설명하고 있는데 작은 화물차 한 대가 멀리서 한 번, 가까이서 한 번 지나갔다.
“저 트럭이 여기에 매일 쓰레기를 버립니다. 지금처럼 낯선 사람이 있으면 주위를 빙빙 돌다가 아무도 없을 때 쓰레기를 잔뜩 내려놓고 가죠. 그럼 얼마 있다가 외국인 노동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와서 그 위에 불을 피웁니다. 돈을 태워버리다니 어리석인 짓이죠.”
◆폐기물 수입이 막힌 중국 재활용업체는 어떻게 됐을까?
라자씨는 무단투기와 소각을 어리석다고 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중국이 지난해 플라스틱 폐기물 수입문을 걸어잠근 뒤 말레이시아는 중국을 잇는 ‘차세대 수입국’이 됐다.
지난해 1∼7월 말레이시아는 플라스틱 폐기물 45만t을 수입했는데, 이는 2017년 한 해 총수입량보다 40%나 많은 양이다.
미국 통계국 자료에 따르면 미국이 중국으로 보내는 플라스틱 폐기물 수출액은 2017년 1억9000만달러(약 2126억원)에서 지난해(1∼10월) 1900만달러로 10분의 1토막 났다.
같은 기간 말레이시아가 수입한 금액은 3100만달러에서 5500만달러로 늘어 중국 수입액을 뛰어넘었다. 말레이시아는 세계 최대 플라스틱 폐기물 수출국 미국의 가장 큰 시장으로 떠올랐다.
문제는 플라스틱 폐기물 수입과 재활용 단계 사이사이에 불법행위가 만연해 있다는 것이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지난해 플라스틱 폐기물 수입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커지자 수입업체를 전수조사했다. 플라스틱 폐기물 수입 허가증인 AP(Approved Permit)를 가진 업체는 114곳이고 실제 영업활동을 하는 곳은 54곳뿐이었다. 그런데 말레이시아 환경단체는 물론 정부도 외국 폐기물로 불법영업을 하는 업체가 수백 곳에 이를 것으로 추정한다.
AP 업체 상당수가 불법 업자들과 손잡은 것이다. 예를 들면 폐기물을 수입만 하고 컨테이너당 4000링깃 정도의 웃돈을 받고 곧장 불법 처리업체에 넘긴다거나 아예 처음부터 AP 면허를 불법업체에 유상양도하는 식이다.
폐기물을 넘겨받은 불법 업체들은 폐플라스틱을 분리·선별해 펠릿이나 플레이크로 가공해서 판다. 폐플라스틱 1t을 처리하면 최소 1000링깃의 순익을 낼 수 있다. 20∼25t 컨테이너 하나로 2만 링깃 이상을 벌어들이는 셈이다.
그런데 폐플라스틱 물량은 넘쳐나고, 분리·선별에는 비용이 든다. 불법업체들은 ‘최소 비용, 최대 효과’ 원칙에 따라 돈 될 만한 굵직굵직한 쓰레기만 골라내고 나머지는 무단투기하거나 불법소각한다.
클랑 주민이자 최근 몇 달간 직접 불법 업체를 조사해 온 치암 얀 투안씨는 “컨테이너 물량 30%만 선별해도 매우 많은 순익을 남길 수 있다”며 “정상적인 폐기물 수입이라면 전량 분리선별해 최소한의 잔재물만 남겨야겠지만, 실상은 30%만 골라내고 70%는 아무 데나 버려지고 있다”고 전했다.
순가이 찬둥 불법소각 현장에서 차로 5분 거리에는 낡은 건물 여러 채가 흉물스럽게 방치돼 있다.
익명을 요청한 클랑의 한 재활용 업체 관계자는 이곳이 23년째 버려진 땅이라고 했다. 1990년대 후반 한 크루즈 회사가 리조트를 개발하려고 이 일대를 사들였다가 회사 경영이 어려워지면서 유령마을이 돼버렸다는 것이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땅에는 쓰레기가 모여들었다. 5∼6년 전부터 서서히 쌓이기 시작했는데 요즘에는 아침에 눈 뜨기 무섭게 쓰레기 더미가 불어난다고 했다.
우리나라, 일본, 미국, 영국, 호주 등 어지간한 나라의 쓰레기는 다 모인 듯했다.
현지 환경단체와 주민, 재활용업자들은 최근 등장한 불법투기업체 대부분이 중국 본토에서 건너온 이들과 관련 있다고 입을 모은다.
폐플라스틱 수입이 막히면서 위기에 몰린 중국 업체들이 앞다퉈 동남아시아로 넘어왔고 현지 합법 업체와 손잡고 수입물량을 빼돌리거나 면허를 빌려 영업을 이어간다는 얘기였다.
클랑만큼이나 심각한 플라스틱 폐기물 문제를 안고 있는 젠자롬 주민 레이 펑 푸아는 “우리 마을에서만 5개 불법업체를 발견했는데 모두 중국인이 운영하는 곳이었다”며 “클랑과 젠자롬에는 북경어를 하는 중국계 말레이시아인이 많아 중국 업자들이 언어장벽 없이 쉽게 진입할 수 있다”고 전했다.
물론 중국 재활용업계의 해외진출이 모두 불법적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마크 카펜터 미국 재활용산업협회(ISRI) 커뮤니케이션 수석 담당자는 세계일보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미국 재활용 업계에도 중국 자본이 많이 들어오고 있다”면서도 “내가 아는 한 그것은 정식 투자의 일종이며, (말레이시아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미국 내에서 불법으로 폐기물을 수입한 뒤 무단투기하는 일은 구조적으로 어려워 보인다”고 전했다.
◆말레이시아 “한국 폐기물 계속 수입할 것”
상황이 이쯤 되면 말레이시아 정부도 특단의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기자가 말레이시아를 방문 중이던 지난달 15일 때마침 플라스틱 폐기물 수입 문제를 책임진 주라이다 카마루딘 주택지방정부장관이 브리핑을 열었다. 주택지방정부 부처는 우리나라 국토교통부의 국토 업무와 행정안전부의 행정 업무를 합친 곳이다.
지난해 말레이시아 정부는 AP를 소지한 114개 업체의 폐기물 수입을 3개월간 중단시키고, 3년 안에 플라스틱 폐기물 수입을 전면 금지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날은 그 후속 대책이 발표되는 날이었다.
뜨거운 관심을 반영하듯 100명이 넘는 참석자가 대회의실을 가득 메웠다.
“플라스틱 폐기물은 전 세계에서 6000억 링깃, 말레이시아에서도 300억 링깃의 시장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말레이시아 경제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큰 산업입니다. 정부는 플라스틱 폐기물 산업을 계속 진행할 것이며, 말레이시아가 선두주자가 되도록 할 것입니다.”
장관의 발표 내용은 예상 밖이었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폐기물 수입의 빗장을 걸어잠글 것처럼 강경했던 주라이다 장관은 이날 7개 국가의 플라스틱 폐기물을 앞으로도 계속 수입할 거라고 했다. 7개 국가 중에는 미국, 호주, 일본 등과 함께 우리나라도 포함됐다. 불법업체 벌금은 올리고 AP허가 조건을 까다롭게 해 깨끗한 플라스틱만 수입하겠다는 단서도 달았다.
브리핑을 마친 장관이 자리를 뜨자 참석자들 사이에서 찬반 격론이 펼쳐졌다. 중국의 빈자리를 선점해야 한다는 수입 찬성 측과 잔재물 없이 깨끗한 폐기물만 수입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반대 측 주장이 팽팽히 맞섰다.
한 시간 넘는 토론 끝에 장관이 다시 브리핑장에 나타났다. ‘폐기물 산업이 돈이 된다면 중국이 왜 수입을 중단했겠는가. 현재 말레이시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환경오염을 직시하라’는 한 참석자의 목소리에 장관이 대답했다.
“저는 오늘 이 나라의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왜 자꾸 과거만 바라보며 300억 시장을 포기하라고 하나요?”
찬성 측에서 박수가 쏟아졌다.
그런데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깨끗한 플라스틱 폐기물’을 누구도 보장할 수 없다는 점이다.
국제적으로 플라스틱 폐기물은 HS 3915라는 코드로 거래된다. 그러나 유해폐기물의 국가 간 이동을 규제하는 바젤협약 대상은 아니어서 깨끗한 폐기물일 필요는 없다. 음식물 찌꺼기가 엉겨붙은 비닐이라도 씻어서 가공할 수 있다면 문제되지 않는다.
컨테이너 물량의 30%만 분리선별해도 충분히 수익을 낼 상황에서 철저한 지도감독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70%는 현지주민들이 감내해야 하는 환경비용이 되기 쉽다.
더구나 말레이시아는 생활폐기물 분리배출을 정착시키는 데 실패해 가정에서 버리는 폐플라스틱을 일반쓰레기와 함께 소각하거나 매립하는 실정이다.
2017년 사이언스지에 실린 논문에 따르면 지구촌이 ‘플라스틱 사회’에 진입한 1950년부터 2015년까지 발생한 플라스틱 폐기물은 63억t에 이른다. 그러나 실제 재활용된 양은 9%에 불과하다. 12%는 소각됐고, 79%는 매립됐거나 어딘가에 방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소각·방치된 91%의 폐기물 중에는 재활용이라는 이름으로 국경을 넘었으나 쓰레기로 생을 마감한 폐기물도 적잖다. 그래서 헹 활동가는 플라스틱 재활용은 신화에 가깝다고 말한다.
“자원으로서 가치가 있다면 선진국은 왜 굳이 남의 나라로 플라스틱 쓰레기를 보낼까요?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는 자체 발생량도 감당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왜 우리가 전 세계의 쓰레기통 노릇까지 해야 하죠? 이제 플라스틱 재활용 신화에서 깨어날 때입니다.”
푸트라자야·클랑·페낭(말레이시아)=글·사진 윤지로 기자 kornyap@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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