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사가 된 허씨
두 달 만에 정착금 다 쓰고 생활고 겪다
자조모임에서 경험 나누고 정보 교환
“정서·경제적 도움받아 삶의 계획 설정”
종합병원 취직한 김씨
시설 퇴소 앞두고 대학 간호학과 진학
고교 담임 추천으로 장학금 지원 받아
“어려울 땐 용기 갖고 주위에 손 내밀길”
민간단체 사업 어떤 게 있나
아름다운재단, 학비·자기계발비 지급
초록우산, 자격증 취득·진로설계 도와
케어센터선 자립 교육 프로그램 진행
성인이 된 뒤 보육원을 나오면서 자립준비청년(보호종료아동)이 된 허씨가 마주한 사회는 녹록지 않았다. 처음엔 자유를 만끽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그는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사고 싶은 것을 샀다. 시설과 다른 자유로운 삶에 제어가 안 됐다. 허씨는 정부에서 준 자립 정착금 500만원을 포함해 그간 저축한 돈을 두 달 만에 다 썼다. 그는 “집 보증금 등 정착을 하는 데 사용해야 하는 돈이지만 당장 욕구를 해소하는 데 돈을 썼다”고 말했다.
◆삶 주저앉았지만… 도움받으며 다시 일어나
허씨의 삶은 주저앉기 시작했다.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월세를 내지 못할 때도 있을 정도로 생활이 버거웠다. 친구들에게 생활비를 빌리기도 했다. 허씨에게 자립을 어떻게 해야 한다고 알려주는 ‘어른’도 없었다. 보육원 선생님들께 조언을 구할까 고민했지만 보호 종료와 함께 관계를 단절했던 그는 선뜻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자유로웠지만 자신이 문제를 해결하고 책임을 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느꼈다. 냉혹한 현실을 깨닫고 비극적인 생각만 했다.
그런 그에게 조금씩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보육원에서 함께 지내던 친구가 보호종료아동이 모인 자조 모임이 있다는 것을 알려줬다. 보건복지부 산하 기관인 아동권리보장원에서 하던 ‘바람개비 서포터즈’였다. 보호가 종료된 청년들이 멘토 교육을 받으며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자립을 앞둔 보호 아동들에게 경험도 나누는 모임이었다.
허씨는 이 모임에 참여하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모두 자신처럼 힘들게 지내는 줄 알았지만 자립을 이뤄낸 청년들이 많았다. 이곳에서 한 대기업이 보호종료아동에게 장학금을 준다는 정보를 알게 돼 3년 동안 대학교 등록금과 월세 등을 지원받았다. 허씨는 근로장학생으로 학교에서도 일하며 생활비에 보탰다. 삶은 나아지기 시작했다. 허씨는 “정서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도움을 많이 받았고, 삶의 계획을 설정할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사회복지사가 된 허씨는 지금의 남편을 만나 2018년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 남편 역시 보호종료아동으로, 허씨에게 자립을 조언해주던 멘토였다. 이 인연이 사랑의 결실로 이어졌다.
올해로 보호종료 8년 차를 맞이한 허씨는 이제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던 보호종료아동들에게 도움을 주는 ‘활동가’로 거듭났다. 그는 2019년부터 아름다운재단에서 하는 ‘열여덟 어른’ 캠페이너로 활동 중이다. 보호종료를 앞둔 후배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나눈다. 자신이 받았던 여러 혜택과 기회들을 그들도 받을 수 있도록 조언한다. 네이버 카페 ‘우리는 열여덟 어른이다’와 팟캐스트 ‘열여덟 어른이 살아간다’도 운영하며 온라인을 통해서도 이야기를 나눈다.
◆“힘들 땐 주변에 손 내밀었으면”
지난달 광주에서 보육원 출신 청년 2명이 극단적 선택을 한 비극적 소식이 연이어 전해진 가운데, 허씨처럼 자립에 성공하며 삶을 나아가고 있는 이들이 있다. 모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주변과 어려움을 나누고 도움을 받으며 극복했다. 이들은 후배들에게 “어렵겠지만 힘들 땐 주변에 손을 내밀었으면 좋겠다”고 목소리를 모았다.
20대 김모씨는 지난해 2월 그룹홈에서 퇴소했다. 이곳에서 지낸 기간은 보호 연장을 포함해 총 13년. 그는 대학에 진학하지 않으면 퇴소해야 한다는 사실에 서울의 한 대학교 간호학과에 입학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바로 자립하기에는 경제적 능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김씨 역시 여러 도움을 받은 경험이 있다. 고등학생 시절 믿고 의지한 담임선생님의 추천을 통해 한 기업으로부터 장학금을 받았다. 이 돈으로 교재를 사거나 생활비에 보탰다. 대학생이 된 그는 초록우산어린이재단에서 하는 자립 멘토링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아름다운재단에서는 장학금을 받기도 했다.
우여곡절을 겪은 김씨는 지난해 그룹홈 퇴소 무렵 서울의 한 종합병원에 취직했다. 그는 이제 스스로 “자립에 성공했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김씨는 “직업을 갖고 돈을 벌면서 나만의 집을 갖기 위해 성실히 월급을 모으는 현재의 생활에 안정감을 느낀다”고 했다.
자립에 성공한 허씨와 김씨는 앞으로 자립하게 될 또 다른 이들에게 응원의 목소리를 전했다. 허씨는 “캠페이너 활동을 하면서 ‘넌 혼자가 아니야’를 키워드로 쓰고 있다”며 “주변에 고민을 나눌 수 있는 비슷한 상황의 친구, 도움을 줄 수 있는 기업과 단체 등이 있다. 이를 모르거나 용기가 나지 않아서 생활고를 겪고 외로운 경우가 많은데 함께 이겨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씨도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보호종료아동들이 많다”며 “현재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용기를 갖고 주변에 말했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정익중 이화여대 교수(사회복지학과)는 “서로 위안이 되고 정보를 나누는 자조 모임을 확대해야 한다. 모임이 잘 이뤄지는지 지원 및 모니터링도 필요하다”며 “고립과 단절에 빠지는 아이들이 많다. 이런 아이들을 찾기 위한 연결 고리를 다방면으로 강화하는 등 정부와 지자체가 발굴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제언했다.
◆1인당 年 500만원 자립정착금 지원
정부와 각 지방자치단체 외 민간단체에서도 자립준비청년(보호종료아동)을 위한 다양한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16일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매년 보호종료아동 2500명가량이 시설 밖 세상으로 내보내진다. 지난 5년(2017∼2021년)간 총 1만2256명이 사회에 나왔다. 한 실태조사에서 ‘죽고 싶다고 생각해 본 경험이 있다’고 답한 비율이 50%에 달할 만큼 보호종료아동들은 시설에서 나온 뒤 어려움을 겪는다. 비영리재단 등 여러 단체는 한 명이라도 더 많은 보호종료아동이 자립에 성공할 수 있도록 여러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다.
아름다운재단은 2001년부터 대학에 재학 중인 보호종료아동들을 상대로 교육비 지원사업을 하고 있다. 연간 학비와 자기계발비로 인당 300만원과 보조비 120만원을 준다. 단순 교육비 지원뿐만 아니라 ‘홈커밍 데이’ 지지 체계 형성 등 다른 보호종료아동과의 연결을 돕기도 한다. 현재까지 900여명의 보호종료아동들이 이 사업에 참여했다. 대학에 진학하지 않는 보호종료아동을 위한 ‘청년 자립정착꿈 지원사업’도 있다. 인당 500만원의 자립정착금을 연간 지원하고 매달 자립 역량 강화 프로그램 및 네트워크 활동을 진행한다. 재단은 이외에도 △청년 경제교육 지원사업 △통신비 지원사업 △배움 지원사업 등을 한다.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은 보호종료아동의 경제적 자립 역량 강화를 위해 진로 설계 지원과 자격증 취득 지원 프로그램을 하고 있다. 지난해 자격증 취득 지원 프로그램에 326명이 참여해 307명이 수료했으며, 이 중 188명(61%)이 원하는 자격증을 취득했다. 재단은 경제적 자립뿐만 아니라 심리·정서적 자립 역량 강화를 위해 심리 치료 등도 한다. 또 생애 첫 정장 선물, 주거비 지원 등 직간접적인 경제적 지원도 한다.
보호종료아동을 위한 커뮤니티 케어센터도 장학사업 및 자립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2020년엔 15명의 장학생에게 5000만원의 장학금을 지원했으며, ‘내 방 관리하기’, ‘선배와의 만남’ 등 30개의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센터의 도움을 받은 한 보호종료아동은 “장학금으로 학원도 다니면서 자격증을 취득해 좋은 기회를 갖게 됐다”고 말했다. 김주하 케어센터 국장은 “더 많은 아동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정부가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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