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과 마주했을 때 비로소 자기 발견
청년의 불안증은 사람들에게서 뒷걸음질 치기 때문에 생긴다. 이들을 위한 치료는 세상으로 뛰어들게 돕는 일이다. “우정을 쌓고 사랑을 나누는 것이 정신과 치료보다 중요해요”라고 그들에게 나는 말한다. 권위주의와 집단주의를 싫어하고 행복한 개인주의자가 될 거라고 아무리 부르짖어도 인간은 혼자 살아가는 데 적합한 동물이 아니다.
외로움을 느끼는 청년에게 부모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부모의 관심에 그들은 오히려 거부감을 느낀다. 그렇다고 부모의 지지가 필요없다는 뜻은 아니다. 부모와 관계가 좋으면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에 덜 빠지기는 하지만 또래와 교감하는 게 이 시기에는 더 중요하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몰두한다. 자기만의 생각과 감정, 공상과 욕구에 빠져 많은 시간을 보낸다. 혼자서 “나는 누구인가?”를 골똘히 생각한들 답이 나올 리 없다. 혼자 이룬 자기 성찰은 불완전하다. “이게 나야!”라고 스스로 믿는 것보다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발견한 자기 모습이 실제에 더 가깝다. 타인의 낯선 모습과 마주했을 때 비로소 남과 다른 자기를 발견할 수 있다.
“삶에서 추구할 나의 목표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도 만남을 통해야 얻을 수 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뭘까?”를 깨닫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기대하는 것과, 자신이 그들을 위해 내줄 수 있는 것을 함께 알아야 인생의 목표가 또렷해진다. 잠재력을 꽃피우려면 우정을 나눌 대상이 필요하다. “친구는 우리를 최고의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타자”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다.
생에 대한 의욕은 언제나 사랑에서 샘솟는다. 세상이 싫어도 자신을 사랑하거나, 자신이 못마땅해도 누군가를 사랑하면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야지”라고 마음먹게 된다. 자신이든 세상이든 둘 중 하나라도 사랑할 수 있으면 된다. 죽고 싶은 마음은 둘 다 사라졌을 때 생긴다. 계약과 이해에 종속된 관계가 사랑으로 이어진 관계를 밀어내면 공동체에서 자살률이 높아진다고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말했다.
자존감은 ‘타인을 향한 사랑’에서 시작된다. 사랑에 빠지면 그에게 마음을 쏟고, 그와 그의 삶을 더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어진다. 목표가 생기는 것이다. 목표가 생기니 의욕이 생기고 노력하게 된다. 시나브로 자신도 성장한다. 그렇게 변화된 자신을 자신도 좋아하게 된다. 비록 처음에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더라도, 사랑하는 대상의 존재로 말미암아 자기를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인간관계에서 앞으로 어떤 화학반응이 일어날지는 미지수다. 좋은 인연이 될지 악연이 될지, 우정을 쌓을지 상처만 남을지, 어떻게 이어지고 끝날지 미리 알 수 없다. 그렇다고 두려워해선 안 된다. 예측불가능성은 타자와의 만남에서 떼어낼 수 없는 요소다.
짧고 약한 만남도 벼락 같은 영향을 줄 수 있다. 우연히 여행지에서 만난 이에게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놓았을 때 문득 어떤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단골 식당의 주인과 소소한 일상사를 나누고, 이웃과 날씨를 주제 삼아 대화하고, 마트 직원에게 따뜻한 인사를 건네면서 우리는 타인과의 만남을 향해 도약해 나아간다. 타자와의 만남이 없다면 미래의 나는 오늘의 나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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