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러시아의 관계가 갈림길에 섰다. 1990년 수교 이후 최대 위기에 봉착했다. 북한의 우크라이나 전쟁 파병으로 한반도 유사시 러시아의 군사적 개입 가능성이 커진 만큼 우리 정부의 대러 외교도 달라진 외교·안보 환경에 맞춰 재검토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한·러시아 간의 긴장과 안보 딜레마는 과거 어느 때보다 커지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고리로 한 북·러의 군사협력과 밀착에 우리 정부의 고심도 깊어지고 있다.
북·러가 6월 말 ‘포괄적 전략 동반자’로 관계를 격상하며 북·러 조약을 체결했을 때만 해도 북한이 우크라이나전 파병까지 할 가능성에는 회의적인 관측이 우세했다. “한쪽이 무력 침공을 받을 시 군사 원조를 제공한다”는 4조 조항이 있었지만, 러시아 내부적으로도 북한에 민감기술을 지원하는 문제에 이견이 나올 정도인 만큼 그 실효성은 높지 않다고 해석됐다. 그러나 약 4개월 만에 상황이 반전되면서 한국이 우려했던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화하고 있다. 러시아를 향한 외교적 소통과 군사기술 이전을 막기 위한 정부 차원의 노력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와의 공조 등을 총동원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북한의 전쟁 참여가 기정사실로 된 상황에서 당장 대러 외교의 뾰족한 수는 찾기 힘들다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맞대응하는 방식으로 우크라이나에 살상무기를 지원하는 등 행동에 나서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는 의미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러시아와의 외교적 공간을 확보하고 활용해야 한다는 게 공통된 의견이다. 현재로써는 북·러 간 중요 기술이 넘어가는 것을 막는 것이 급선무이며, 한·러 관계의 장기적 방향성은 2주 앞으로 다가온 미국 대선 이후 전쟁 종료 여부나 미국 새 행정부와의 연합에 맞게 설정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최우선 국립외교원 국제안보통일연구부장은 21일 세계일보와 통화에서 “러시아에서 북한으로 핵 관련 기술이 넘어갈 정도가 아직은 아닌 듯하지만 불확실성은 커졌다”며 “이를 저지하는 것이 제일 시급하기 때문에 외교적 통로를 통해 러시아를 강하게 압박하는 방법밖에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대러 외교의 기본 입장을 바꾼다기보다는 압력을 높여야 한다는 의미다. 최 부장은 “한국이 선제적으로 군사 행동을 할 경우 빌미만 주고 우리가 가진 가장 큰 레버리지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좋지 않다”며 “국제사회 여론 등도 동원하면서 외교적으로 최대한 설득하고 압박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석배 전 주러 대사는 “북한이라는 호전적 집단을 이웃으로 둔 한국이 일본, 호주, 캐나다 등과 같은 외교를 할 수는 없다”며 “정부 간 대화 채널을 최대한 구축해서 러시아의 의중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이 전 대사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의 존재감을 단속해야 한다는 세계 전략 속에 러시아가 접근하고 있기 때문에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더라도 북한의 전략적 가치는 러시아에게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라며 “미국과 러시아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듯이 한·러 관계도 복원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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