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 패싱한 채 책임도 돌려
美·北 간 핵 협상시 韓 배제 우려
자조·자립·자강의 중요성 일깨워
세계는 19세기식 제국주의 시대로 회귀하기라도 했을까. 지금 우리는 강대국 정치의 적나라한 장면들을 목도하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식을 여러 차례 공언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연출하고 있는 ‘종전 협상 쇼’가 그것이다. 3년 넘게 끌어온 우크라이나에서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끝내자는 명분으로 미국이 러·우 전쟁 종전의 주역을 자처하고 나섰다.
그런데 미국의 협상 행보가 충격적이다. 미국은 전쟁 당사국인 우크라이나마저 배제한 채 러시아만을 상대하고 있다. 지난 12일 트럼프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전화 통화를 통해 러·우 전쟁 종전을 위한 협상에 합의했다. 곧이어 지난 18일에는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미·러 고위급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양국은 경제·투자 협력과 러·우 전쟁 종전 협상을 위한 고위급 협상팀 구성 등에 합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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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뿐만이 아니다. 트럼프의 미국은 일방적으로 러시아의 입장을 두둔하고 있다. 우선 미국은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 불허 및 우크라이나 영토 탈환 불가 등 러시아의 요구에 동의했다. 또한 유럽연합(EU)에 대해서는 러·우 전쟁 종식을 위해 대러 제재 조치의 해제를 포함한 양보 필요성을 지적하고 있다. 미국은 러시아를 협상 테이블에 앉히기 위한 분위기 조성을 넘어 미·러 관계의 전환을 통한 중국 견제 강화와 종전 이후 자국의 경제적 이익 실현이라는 큰 그림을 염두에 두고 협상을 추진하는 것으로 보인다.
더 나아가 트럼프는 전쟁의 책임을 우크라이나에 돌리는 듯한 발언으로 논란을 빚고 있다. 트럼프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향해 “애초에 전쟁을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언급했다. 이는 우크라이나가 전쟁을 자초했다는 주장으로 들린다. 푸틴의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정책이 러·우 전쟁을 불러일으켰다고 주장해왔다.
그러한 미·러 단독 협상에 대해 우크라이나와 유럽 주요 국가들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젤렌스키가 종전 협상에서 전쟁 당사국인 우크라이나가 배제된 것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자 트럼프는 젤렌스키의 정치적 정당성을 문제 삼아 ‘독재자’라는 직설적인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초기 협상 과정에서 배제된 유럽의 불만 제기에 대해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전쟁을 계속하려는 유럽은 초대될 자격이 없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한편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패싱을 넘어 젤렌스키 정부에게 엄청난 경제적 이권까지 요구하고 있다. 트럼프는 지난 12일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을 우크라이나에 보내 러·우 전쟁 발발 이후 미국이 제공한 군사 지원의 대가로 희토류를 포함한 우크라이나 광물 개발 수익권을 넘길 것을 요구하는 광물협정 초안을 제시했다. 젤렌스키는 미국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안전보장 확약이 선행되어야 한다면서 일단 그것을 거부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당초 미국이 제시한 5000억달러의 수익권 보장 부분이 빠진 형태로 결국 협정에 동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만큼 우크라이나의 상황이 급박하다는 뜻이다. 반면에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 서방을 분리시키고 대러 제재 해제까지 노리고 있다.
그렇다면 이번 러·우 전쟁 종전 협상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과 함의는 무엇인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트럼프 행정부의 압박과 거래 외교에 선제적 대응책을 마련하는 일이다. 특히 전쟁 당사국 우크라이나에 대한 트럼프의 패싱과 압박 행보를 예의 주시해야 한다. 향후 미·북 간 대화와 핵 협상이 시작되면 경우에 따라 대한민국이 배제될 수도 있다. 우리는 그러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대비책을 단단히 강구해 두어야 한다. 반도체, 조선 등 경제적 카드 활용은 물론 침체된 한·러 관계의 개선과 한·중 간 소통 강화 등이 대안에 포함되어야 한다. 트럼프의 ‘종전 협상 쇼’는 리더십 위기 속에서 표류하고 있는 대한민국에 자조, 자립, 자강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죽비(竹扉)와 같다.
장덕준 국민대 명예교수·유라시아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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