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전쟁 장기화가 한국 경제에 '복합 인플레이션 충격'으로 번지고 있다. 국제유가 급등과 원·달러 환율 상승이 동시에 나타나면서 물가 전반에 상방 압력이 커지는 흐름이다.
특히 단기 차익을 노린 투기성 외환 거래까지 가세하면서 고유가·고환율발(發) 물가 불안 경고음도 한층 커지고 있다.
24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달 생산자물가는 전월 대비 2.5% 상승했다. IMF 외환위기 시기였던 1998년 2월(2.5%) 이후 28년 2개월 만의 최대 상승폭이다.
전년 동월 대비로 봐도 6.9% 상승해 지난 2022년 10월(7.3%) 이후 3년 6개월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핵심 배경은 에너지 가격 급등이었다. 석탄·석유제품 가격이 한 달 새 31.9% 치솟았고 화학제품도 6.3% 상승했다. 중동 전쟁 장기화로 국제유가와 나프타 가격이 급등한 영향이 국내 생산 단계에 직접 반영된 것이다.
지난 2월 말 발발한 중동전쟁 여파로 3월(1.6%)에도 생산자물가 상승폭이 확대된 데 이어, 4월에는 국제유가 급등 영향이 본격 반영되면서 상승세가 한층 가팔라진 것으로 분석된다.
문제는 이 같은 물가 충격에 더해 환율 상승까지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서울 외환시장에 따르면 원·달러 환율은 이달 초까지 1450원대 박스권에서 움직이다 중순 이후 상승세를 보이며 지난 15일 1500원선을 돌파했다.
이후 6거래일 연속 1500원대를 이어갔으며, 지난 22일에는 장중 1519.4원까지 치솟으며 1520원선 돌파를 눈앞에 두기도 했다.
한국 경제는 원유·가스·원자재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는데, 국제유가가 오른 상황에서 환율까지 상승하면 달러 기준 원자재 가격 상승분에 원화 가치 하락 부담까지 겹치면서 국내 수입물가 상승 압력이 한층 커지게 된다.
이후 원재료 가격 상승은 석유화학·물류·전기·가공식품·외식·서비스업 등 경제 전반으로 확산할 가능성이 크다.
실제 4월 국내공급물가는 전월 대비 5.2% 상승했고 원재료 가격은 28.5% 급등했다. 국내 생산품 전반의 가격 변동을 보여주는 총산출물가 역시 전년 동월 대비 13.8% 뛰었다. 생산 단계 충격이 경제 전반으로 빠르게 번지고 있다는 의미다.
여기에 단기 차익을 노린 투기성 외환 거래까지 확대되고 있는 점도 추가 불안 요인으로 꼽힌다. 중동 전쟁 장기화와 환율 급등 흐름 속에서 달러 강세가 추가로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에 환차익을 노린 거래가 유입되고 있는 것이다.
실제 외환당국은 최근 환율 급등 흐름에 투기적 거래 수요가 일부 가세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환율이 1520원 직전까지 치솟았던 지난 22일 "원·달러 환율 움직임이 펀더멘털 대비 과도한 측면이 있어 경계감을 갖고 지켜보고 있다. 필요 시 단호히 조치할 것"이라고 밝히며 구두개입에 나서기도 했다.
특히 외환당국은 달러 매도에 나서는 등 실개입 가능성까지 열어두고 있는 상황이다.
허장 재경부 2차관은 지난 20일 외환시장 간담회에서 "시장 변동성 확대가 투기성 거래 증가로 전이되지 않도록 필요 시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공개 경고한 바 있다.
이와 관련해 재경부 관계자는 "시장 상황에 따라 구두개입부터 보다 강한 조치까지 단계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의미"라며 "실개입의 경우 외환당국이 달러를 매도해 환율 상승 속도를 조절하는 방식도 포함될 수 있다"고 전했다.
이 같은 고유가·고환율 복합 충격 속에 정부도 최근 소비자물가 상승 압력이 예상보다 확대될 가능성을 공식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강기룡 재경부 차관보는 지난 20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민생물가 특별관리 관계장관 TF 공개안건' 관련 백브리핑에서 "5월 소비자물가는 4월보다 올라갈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3월 2.2%, 4월 2.6%에 이어 5월에는 2% 후반대로 올라설 가능성을 시사한 것이다.
특히 정부 안팎에서는 5월 소비자물가가 3%대까지 오를 가능성도 거론된다. 지난해 5월 유가가 상대적으로 낮았던 데 따른 기저효과까지 겹치기 때문이다.
강 차관보는 "석유 최고가격제로 경유와 휘발유 가격을 2000원대로 유지하고 있지만 지난해 5월에는 이보다 더 낮은 수준이었기 때문에 그런 기저효과로 5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전월보다 더 높아질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국제유가와 환율이 동시에 오르는 상황에서는 물가 상승 압력이 예상보다 길게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에너지 가격 충격이 교통·물류·가공식품·서비스 가격으로 연쇄 전이되는 데다 지난해 5월의 낮은 기저효과까지 겹치면 소비자물가가 3%대까지 오를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소비자물가 3%대 경고음이 켜지면서 정부는 유가·환율·생활물가를 중심으로 범부처 대응 수위를 끌어올리고 있다.
실제 정부는 유류세 인하 연장과 석유 최고가격제 운영, 취약계층 대상 고유가 피해지원금 지급, 농축산물 할인 지원 확대 등을 추진하고 있다.
아울러 석유류·생필품 분야의 매점매석과 가격 담합, 사재기 등 불공정 거래 단속도 강화하고 있다.
재경부 관계자는 "소비자물가 상승세가 다시 확대될 가능성에 대해 경각심을 갖고 대응하고 있다"며 "중동 정세와 국제유가, 환율 변동 등을 매일 점검하면서 민생 부담이 커지지 않도록 물가 안정 조치를 총동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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