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협정 60주년] ② 유영복 6·25 국군포로가족회 명예회장의 피맺힌 증언 “南에선 잊혀지고 北선 온갖 고통… 결국 자력으로 탈출했죠” 입력 2013-06-04 16:16:00, 수정 2013-06-04 20:44:27 ![]() ―적군 포로라는 신분으로 북한에서 살면서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을 것 같다. “아오지 탄광이 왜 아오지인지 아나. ‘아 여기를 왜 와. 오지 말라’고 해서 아오지라고 한다. 국군포로 몇 만 명이 아오지 탄광 같은 광산에서 수도 없이 비참하게 죽어갔다. 내가 있던 검덕 광산은 ‘들어가는 사람은 있어도 (살아서) 나오는 사람은 없다’던 곳이었다. 지하 1000m 넘는 막장에서 하도 땀을 흘리니까 더 이상 땀도 안 나오고 피부가 버석거렸다. 매일 같이 발파작업을 하는데 팔다리가 부러지는 것은 사고 축에도 못 끼었다.”
“그렇다. 내가 북한에서 이루었던 가족도 설움을 많이 받았고 원래 북한에 있던 어머니와 동생에게도 그랬다. 북한 황해도에 어머니와 동생 넷이 살고 있었다. 동생 중에는 내가 국군포로 출신이라는 것을 모르는 경우도 있었다. 내 가족과 동생 가족 모두 북한에서 노동당 입당도 안 시켜주고 군 입대도 못했다. 사실 우리는 북한에 총부리를 들이댔던 사람들이었지 않나. 나중에는 제수씨에게서 차라리 (어머니를 찾아)오지 말지 그랬냐고 원망하는 얘기도 들었다.”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을 것 같다. “최전방에서 싸우다가 포로로 잡혀왔는데 우리 정부가 설마 나몰라라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른 국군포로 출신들도 ‘이렇게 계속 살겠느냐’면서 내심 귀환할 날만 기다렸다. 하지만 그런 기대를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다. 그런 말을 조금이라도 발설하면 보위부로 끌려갔다. 그래서 아는 사람들끼리는 눈빛으로 통하면서 아무 소리 못하고 기다린 것이었다. 그러다가 1972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북한에 온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그러자 한 친구는 ‘옷이라도 새로 장만해 남한 갈 때 입어야 되는 거 아니냐’고 말할 정도로 국군포로들 사이에서 기대감이 일었다. 동료들은 죽으면서 유해라도 고향에 묻어달라는 말을 남겼다.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에 온다고 했을 때도 우린 눈물을 흘리며 드디어 돌아간다고 기뻐했다. 그런데 (제1차 남북정상회담이 끝나고 발표된) 6·15 공동선언에 국군 포로 얘기는 전혀 없었다. 남북한 모두 국군포로는 없다고 하는데 우리는 허공에 붕 뜬 것 아니었나.”
“처가 죽기 전에 한 말이 있다. 1994년이었는데 ‘꼭 남쪽으로 가라고. 오래오래 살다가 좋은 세상 보고 가라’고 했다. 나도 점점 나이를 먹어 얼마나 더 살지 모르는데 남북정상회담에서도 국군포로를 쏙 빼버리자 결심을 했다. 중국을 오가는 보따리상에게 ‘내가 살 만큼 살았는데 붙잡혀 죽어도 여한이 없다’며 따라가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6·15 남북정상회담을 한 지 한 달쯤 뒤인 7월20일에 집을 떠났고 27일에 두만강을 넘었다. 서울에 도착한 것은 8월30일이었다.” ―47년 만에 돌아온 한국의 모습은 어땠나. “김포공항에 내려서 깜짝 놀랐다. 활기 있게 다니는 사람들 모습, 차량들 대열, 아파트와 건물들. 김일성이 고깃국에 쌀밥 먹여주고 지상천국 만들겠다고 했지 않았나. 한국 와서 보고 여기가 지상낙원이 됐구나. 이런 모습을 동료들이 봤다면 여한도 없이 죽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입대하기 전날인 1952년 8월20일 서울에서 아버지, 여동생과 마지막으로 사진을 찍었다. 48년 만에 만난 아버지는 94살 이었는데 편찮으신 상태였다. 처음에는 나를 못 알아보시고 ‘네가 영복이야?’는 말만 하셨다. 그도 그럴 것이 현충일마다 제 무덤에 왔었다고 한다. 나중에야 ‘논산훈련소에 면회갔던 영복이 맞구나’ 하시며 나를 알아보셨다. 내 생각으로는 아버지가 통일이 돼야 나를 만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저를 기다리신 것 같다. 간절한 희망이 있으면 그런다고 하지 않느냐. 내게 어머니와 동생들 돌봐주느라 고생했다고 했다. 그러고 6개월 만에 돌아가셨다.” ―북한에 두고온 가족 생각이 많이 났겠다. “그 애들에게 제일 미안하다. 아내는 나를 만나 힘들게 애들을 키웠고 그 아내의 유언이 마지막까지 버틸 수 있는 힘이 됐다. 다행히 아들과 며느리, 손자를 한국으로 데려와 아내에게 미안함은 일부라도 덜어낼 수 있게 됐다. 북한에 있는 딸과는 연락을 하고 지내는데 ‘아버지 좀 도와주시오’ 하면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도움을 주려고 하고 있다. 내가 이렇게 책임지고 있으니까 하늘나라에 있는 아내도 ‘내 말대로 실천하는구나’ 하면서 그나마 마음을 놓고 있을 것 같다.” 글 안두원·사진 이재문 기자 flyhigh@segye.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