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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애의 영화이야기] 뮤지컬 보는 듯한 변사들의 쇼쇼쇼 ‘무성영화’

'청춘의 십자로'(감독 안종화·1934)
태어날 때부터 모든 영화가 ‘유성’이었던 관객들에게 ‘무성영화’는 마치 미지의 세계와 같을지 모른다.

무성영화는 글자 그대로 ‘소리가 없는 영화’를 뜻한다. 그렇다면 관객들은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적막한 극장에서 조용히 피사체의 움직임만을 바라봐야 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았다. 무성영화는 단지 영화 제작과정 중에 소리를 녹음하지 않은 영화일 뿐 영화관에서 상영될 때에는 영화관에서 고용한 음악가들의 연주와 변사의 해설이 곁들여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관객 입장에서 무성영화는 분명 ‘소리가 있는 영화’였다.

최초의 영화로 알려진 프랑스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들이 상영된 1895년 프랑스 파리의 그랑 카페에서도 피아노가 연주됐다. 반주의 개념으로 음악이 연주된 것인지, 영사기 소음을 가리기 위해 연주된 것인지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긴 하지만.

이후 영화관 규모에 따라 오케스트라 연주부터 피아노 연주까지 다양한 규모의 음악 연주가 무성영화 상영때마다 있어왔다.  

종로에 있던 단성사도 ‘단성사 악단’을 운영했는데, 영화 상영 시간이 되면 2층 발코니에서 음악 연주로 상영 시간을 알리기도 했다.

영화관에는 음악가뿐만 아니라 변사도 있었다. 변사는 영화의 내용을 스크린 옆 무대에서 해설해주는 역할을 했다. 상영 회차마다 여러 명의 변사가 돌아가며 해설했다고 한다. 인기 변사는 스카우트 경쟁이 일기도 했고, 그 인기는 배우의 인기를 능가하기도 했다. 바로 앞 무대에서 능숙한 말솜씨로 해설하는 변사를 관객들이 좋아하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19세기 말 탄생한 영화는 1927년이 되어서야 영화 제작과정 중 녹음이라는 작업도 시작하게 된다. 무성영화 시기 영화의 소리를 담당했던 영화관의 역할이 영화제작사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전 세계 영화 관객들이 동일한 영화를 보고 듣게 됐다.

그러나 배우의 목소리가 들리는 신기한 유성영화가 모든 이들의 환영만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유성영화 제작에 반발했던 영화인들도 있었고(예를 들면 찰리 채플린), 기존 영사기를 교체하고 스피커 등을 설치해야 했던 영화관들의 반발도 있었다. 경제 공황을 겪던 당시 미국에서는 전국 영화관에서 대량으로 해고된 음악가들의 실업 문제가 심각했다고도 한다. 

'청춘의 십자로'
관객도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음질도 좋지 않은 소리를 듣기 위해 침묵을 강요당했으니 적응이 필요했다. 우리나라에서는 1935년부터 유성영화를 제작하게 되는데, 그 사이 수입된 외국 유성영화를 먼저 접한 관객들 중 많은 이들은 2시간 가까이 알아듣지도 못하는 외국어를 들으며 시끄럽고 정신없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주변 어르신 중에는 한국전쟁 이후까지도 영화를 무성영화 방식으로 즉 변사의 해설과 음악 연주를 들으며 봤다고 증언하시는 분들이 의외로 많다. 유성영화 용 영사기가 미처 확보되지 않은 이유도 있었지만, 유성영화를 낯설어 하는 관객들을 위해 기존 방식대로 상영된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우리 극영화인 ‘청춘의 십자로’(감독 안종화, 1934)가 2008년 발굴된 후 첫 공개됐을 때와 2012년 문화재로 지정됐을 때 과거 상영방식을 재현한 행사를 두 차례 관람한 적 있다. 

건반, 아코디언, 콘트라베이스 등으로 구성된 밴드의 연주와 애드리브가 곁들어진 변사의 해설, 그리고 영화 상영 전 후 남녀 배우가 부르는 노래를 듣다보니 뮤지컬 공연을 본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영화 내용을 파악하는데 어려움도 전혀 없었고, 볼 때 마다 새로운 영화를 본 느낌이기도 했다.

사실 무성영화는 영상물과 공연이 어우러진 종합예술에 가까웠다. 똑같은 영화라 하더라도 상영되는 영화관과 회차에 따라 다른 음악, 다른 해설이 추가됐기 때문에 각각의 다른 영화 혹은 공연으로 보일 가능성도 컸다. 무성영화 시기 영화관이 요즘의 영화관 보다 훨씬 흥겨운 공간이었을지도 모른다.  

발굴 이후 국내외에서 지속적으로 공연되고 있는 ‘청춘의 십자로’는 지난 4월30일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 KOFA에서도 공연된 바 있고, 오는 5월24일에도 부산 영화의 전당에서 공연된다고 한다.

3D나 4DX 등 최신 상영 기술에 익숙해있는 세대들에게 아날로그 방식의 영화 상영은 신선한 충격을 안겨줄지도 모른다. 영화에 관심 많은 마니아나 씨네필이라면 시끌벅적했던 그때 그 시절 무성영화의 진짜 매력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거라 확신한다.

서일대 영화방송과 외래교수
사진=한국영상자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