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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헌의 만史설문] <93> 원숭이가 만든 바보

한자 ‘속뜻’ 모른 채 ‘여러 뜻’ 아는 체하는 오류 범해서야

요즘 한자 구경 많이 한다. 올해 이름 병신년 때문이다. ‘병든 몸’ 병신(病身)이 몸과 마음의 장애를 가진 이들을 낮잡아 부르는 말로 통용되는 데다, 해 년(年)은 여자를 비하하는 말과 발음이 같다. 병신년(丙申年)이라고 괄호치고 한자를 병기한다. 평소 안 하던 행실이다.

동음이의어(同音異議語·homonym·호모님)는 우리말만 아니라 여러 언어에서 특이한 현상을 빚는다. 그러나 이전에는 한자어의 경우 한자를 연상하여 어느 정도 구분이 가능했는데, 이젠 소리만 남아 이런 코미디를 더 짓는다. 丙申, 病身 둘 다 [병:신]으로 ‘병’이 긴 소리여서 한자 말고는 변별(辨別)의 열쇠가 없다.

매년 이맘때면 신문과 방송들은 이런 글과 민속의 이미지들을 보여준다. 병신년 이름이 ‘좀 그래서’인지, 아니면 원숭이가 일반적으로 ‘바보 같다’는 평가를 받는 동물이어서 그런지 올해 띠 풀이 기사는 좀 달랐다. 띠 동물의 장점과 덕성(德性)을 살펴 새해의 의미를 새기는 것이 연례적인 기사들이지 않았던가. 

말 위에 원숭이가 두 마리 앉아 있다. 얼른 더 많은 벼슬하라는 기원의 뜻일까?
‘산동인’ 블로그 사진 인용
‘붉은 원숭이의 총명함’에 대한 의례적(형식적)인 언급 말고는, 조삼모사(朝三暮四) 견원지간(犬猿之間)과 같은 원숭이의 어리석음에 주목하는 것 같은 얘기가 많이 인용됐다. 착월선후(捉月??)나 심원의마(心猿意馬) 또한 대동소이(大同小異)다.

한자어를 이리 많이 쓰면 꼭 오류가 드러난다. 정치가들이 실없는 ‘문자질’로 자주 무식을 드러내는 것처럼, 일부 매체의 ‘바보짓’도 하릴없다. 우리말 중 어떤 말은 바탕에 한자(漢字)가 있어서 그 속뜻으로 여러 뜻을 빚어낸다. 그 ‘한자의 바탕’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속뜻’은 건너뛰고 ‘여러 뜻’을 아는 체하다 보면, 어느덧 봉숭아학당의 웃음꽃 피어난다.

“마상봉후(馬上封侯)는 말 위에 올라탄 원숭이 모양의 도자기라는 의미로, 중국에서 승진과 영전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주고받던 귀한 선물이다. 말의 등이나 머리 위에 원숭이가 올라탄 형태의 그림을 도자기 위에··· 원숭이는 영장류인 만큼 동물 가운데 인간과 가장 그 형태가 유사한 만큼, (원숭이의) 도움을 받아 승승장구하기를 바란다는 뜻이 담겼다.” 

백제금동대향로의 신선들의 숲에서 사는 2마리 원숭이 중 한 마리. 이 향로와 비슷하게 분류되는 중국의 박산향로에도 원숭이 형상 조각이 있다.
국립부여박물관 제공
‘머니투데이’라고 하는 매체의 글이다. 말 馬, 위 上, 벼슬 줄 封, 벼슬 侯의 어느 글자에도 ‘원숭이’는 없다. ‘말 위에 올라탄 원숭이 모양의 도자기라는 의미’는 속뜻 없이 건너뛴 해석이다. 말하자면 논리의 비약인 것이다. 인간과 비슷하니 원숭이의 도움 받으면 승승장구할까? 과연 그럴까? 그런 ‘의미’를 왜, 어떻게 단정(斷定)했지? 몰라서 그랬으리라 본다.

네이버에도 올랐다. 그래서 그럴싸했을까? 이 글 인용한 글이 인터넷에 쫙 깔렸다. 봉후는 ‘원숭이 도자기’다, 원숭이 도움으로 승승장구하자는 기원을 담았다 등등. 언론은 사회의 (말) 선생이기도 하다. 좋은 선생은 좋은 본보기로 세상을 아름답게 한다. 왜 모르는 말을 아는 체 글로 옮겨 제 글 보는 독자들을 바보로 삼을까, 웃자고 하는 짓인가?

중국어에서 ‘말의 등 위’라는 마상(馬上)은 얼른, 빨리 등의 뜻이다. 말 위에서는 뭐든 빨리 해야 실수가 없다. 벌과 원숭이가 말을 탄 그림이나 조각이 있는 도자기를 그들은 ‘마상봉후’라고 부른다. 말 등에 원숭이만 올라탄 것도 있는데 이는 아마 ‘마상후’(馬上侯)이겠다.

벌 봉(蜂)의 중국어 발음은 ‘펭’이다. 벼슬 즉 관직(官職)을 주거나 받는 봉(封)의 발음도 ‘펭’이다. 벌(의 모양)이 벼슬을 받는다는 이미지 대신에 도자기 그림에 들어간 것이다. 또 원숭이 후(?)의 중국어 발음은 ‘호우’다. 높은 벼슬의 이름 후(侯)도 ‘호우’다.

벌(봉蜂)과 원숭이(후?) 그림이 제후 벼슬을 받는(封侯) 뜻으로 비유된 배경이다. ‘얼른 큰 벼슬(제후)을 받으라’는 축원인 것이다. ‘원숭이 도움을 받으라’는 ‘가라사대’의 말씀이 아니다.

말 잔등에 파리 한 마리가 붙어 있는 그림도 있다. 파리를 뜻하는 승(蠅)자의 중국어 발음은 ‘잉’이다. 이겨서 얻다, (그릇에) 가득차다는 뜻의 영(嬴)자의 중국어 발음이 또한 ‘잉’이다. ‘얼른 이겨 바라는 바를 얻으라’는 축원을 말 등의 파리 그림으로 대신한 것이다.

중국어와 중국문화 안으로 한참 깊숙이 들어가야 이해가 될까 말까 한 ‘중국 이야기’다. 게다가 도자기에 축원의 뜻을 담아 선물로 활용한 그들의 전통이다. 우리가 알아서 별 도움이 될 주제가 아니다. 이런 이야기를 뜻도 모르면서 아는 체 주절거린 것은 무슨 의도일까? 언론의 고객인 독자는 문득 바지저고리가 됐다.

한자와 전통문화를 알려는 뜻은, 우리에게 아무 소용도 없는 이런 얘기로 호사(豪奢) 취향을 만족시키거나 허황된 현학(衒學)을 펴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말과 우리 문화의 뜻을 또렷하게 장엄(莊嚴)하자는 것이다. 이런 뜻이 우리 겨레의 진짜 존엄(尊嚴)을 세우는 일이다.

강상헌 언론인·우리글진흥원 원장

■사족(蛇足)

또 이 매체는 “착월선후(捉月獮猴)는 어리석은 원숭이가 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고 한다는 의미의 사자성어다.”라고 썰을 풀었다. 한자사전을 펴볼 줄 알았다면 이런 글 쓸 수 없다. 잡을 捉, 달 月, 죽일(사냥) ?, 원숭이 ?의 뜻에서 그 답이 바로 나온다. 직역하면 ‘달 잡으려던 것(동작)이 원숭이를 죽였다’다. 달 잡으려다 원숭이가 죽었단다. ‘어리석은 원숭이가 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고 한다는 의미’라는 그 글과 비교하면 어떤가? 원숭이들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우물 속의 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다 가지가 부러지는 바람에 죽었다는 고사다. 말의 뜻을 안 다음에 쓰는 것이 글이다.

파리(승蠅)가 붙은 말 도자기. 얼른 승리해서(영嬴) 많은 것을 성취하라는 기원의 뜻이겠다. 蠅과 嬴은 중국어 발음이 둘 다 ‘잉’이다.
‘산동인’ 블로그 사진 인용
예전 이 매체가 ‘라온힐조’라는 칼럼 앞에 매번 ‘라온힐조란 즐거운 이른 아침을 뜻하는 순우리말입니다.’라고 써서 그 잘못을 지적한 바 있다. 이른 아침의 뜻 힐조(詰朝)를 순우리말로 잘못 알았던 것이다. 글은 곧 바뀌었지만, ‘라온힐조가 즐거운 이른 아침의 순우리말’이란 틀린 뜻이 광고나 상품명, 인터넷 글쓰기 등에 이미 독버섯처럼 퍼져가고 있음을 주목한다.

서너 해 전, 밑도 끝도 없이 ‘아라’가 바다의 순우리말이라는 근거 없는 말이 인터넷 공간에 퍼졌고, 장관이라는 (고위 공직)자까지 공적인 문장에 그 말을 베껴 쓰다 우세를 산 블랙코미디도 있었다. 말은 겨레의 순정(純正)한 뜻을 담는 그릇이다. 흐리멍덩하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