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기마다 구심점… 국민 존경 한몸에 서거한 푸미폰 태국 국왕은 입력 2016-10-13 23:10:57, 수정 2016-10-13 23:14:27 13일(현지시간) 서거한 푸미폰 아둔야뎃 태국 국왕(88)은 가난한 국민의 삶을 돌보며 오랜 기간 존경과 사랑을 받은 인물이었다.
태국 국민들은 불안한 정국 속에서도 태국이 동남아시아에서 비교적 높은 자유와 안정을 누리고 있는 것은 푸미폰 국왕이 사회 구심점으로서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또 막대한 왕실 재산을 농업 및 지역 개발 사업에 투자했다. 젊은 시절 산간 벽지의 가난한 농민과 소외된 소수 민족을 찾아가 민중의 삶을 어루만졌다. 국왕이 산간벽지를 찾아다니며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려는 모습은 국민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푸미폰 국왕은 농업, 수자원, 환경, 고용, 보건, 복지 등을 망라해 국민의 삶을 개선하려는 ‘로얄 프로젝트’라는 이름의 사업을 추진했다. 북부의 소수 종족인 고산족의 복지를 높이는데 기여하며 1988년 아시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막사이사이 상을 받았다. 2006년에는 유엔으로부터 제1회 ‘인간개발 평생업적상’도 받았다. 코피 아난 당시 유엔사무총장은 그가 “신분과 종족, 종교를 초월해 극빈자와 취약 계층을 위해 헌신했다”고 평가했다. 푸미폰 국왕이 격변기에 권위있는 중재자로 나설 수 있었던 건 이런 인생 여정을 토대로 국민의 신뢰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1932년 절대왕정이 폐지되고 입헌군주제가 도입된 이후 추락하던 왕실의 위상은 푸미폰 국왕에 이르러 회복됐다. 그의 즉위과정이 순탄했던 건 아니었다. 그가 5살이 되던 1932년에 절대군주제가 폐지됐고 당시 국왕이던 라마 7세는 1934년 혁명 주체세력과 갈등을 빚으며 영국으로 망명했다. 푸미폰의 형인 라마 8세에게 왕위를 넘겼지만 라마 8세는 1946년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19세였던 푸미폰은 이런 비극 속에 1946년 6월9일 왕위를 계승했다. 푸미폰 국왕의 위독 소식이 전해지며 방콕 시리라즈 병원 앞에는 지난 수일간 수천명의 시민들이 몰려와 국왕의 쾌유를 기원했다. 결국 그가 영면에 들자 태국 국민들은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이현미 기자 engine@segye.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