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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태 소환조사 임박… 역대 대법원장들 수난사 [이슈+]

사법부 수장, 국가서열 3위… 대법원장 어떤 자리?

#1. “나는 이 나라에서 나보다 높은 사람은 대통령밖에 없는 사람이다.” 1985년 유태흥 당시 대법원장이 어느 까마득한 후배 법관에게 했다고 전해지는 말이다. 그 판사는 대법원장이 단행한 법관 정기인사를 비판하는 글을 한 매체에 기고했다가 즉각 대법원장실로 불려가 이런 호통을 듣고 지방의 법원으로 전보됐다. 국가 의전서열은 대통령, 국회의장, 대법원장 순으로 대법원장이 3위이나 이렇다 할 실권이 없는 국회의장에 비해 대법원장은 사법행정권 등 엄청난 권한을 갖고 있으니 스스로 ‘대통령 바로 아래’라는 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구속 수사해서 사법부 붕괴를 막고 수사를 조속히 끝내세요.”(민주평화당 박지원 의원) “유념하겠습니다.”(문무일 검찰총장) 지난 25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대검찰청 국정감사에서 법사위원과 검찰총장이 나눈 문답이다. 박 의원은 이미 법사위 법무부 국감에서도 박상기 법무장관한테 같은 말을 했다. 수사 책임자인 문 총장이 유념하겠다고 했으니 양 전 대법원장으로선 구속될지도 모를 위기에 내몰린 셈이다. ‘대통령 바로 아래’를 자처했던 33년 전과 비교해 대법원장의 권위가 이렇게 땅에 떨어졌나 싶어 탄식만 나온다.

서울중앙지검 수사팀(팀장 한동훈 3차장검사)의 법원 수사가 소수의 전직 고위 법관들로 포위망을 좁혀 가는 모양새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그 직속상관인 법원행정처장을 지낸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 그리고 행정처 처장과 차장을 모두 거느렸던 양 전 대법원장 이렇게 4명이 핵심 타깃이다. 국민적 이목은 무엇보다 파문의 정점에 있는 양 전 대법원장, 그리고 대법원장이란 직위에 쏠린다.

검찰 소환조사 앞둔 대한민국 제15대 대법원장 양승태. 
세계일보 자료사진
◆현직 김명수까지 총 14명의 대법원장 탄생

27일 법조계에 따르면 올해로 꼭 70년이 된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대법원장이란 지위는 그리 순탄한 자리가 아니었다. 다들 ‘삼권분립의 한 축’이라고 불러주긴 하나 행정부와 국회가 독주하는 가운데 법원은 무대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대중의 관심을 거의 받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국민은 정치권력과 사법부가 정면으로 충돌할 때, 또는 정권교체기에 사법부도 덩달아 충격을 받고 흔들릴 때 비로소 사법부 수장인 대법원장한테 눈길을 돌리곤 했다.

현 문재인 대통령이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이듯 현 김명수 대법원장은 대한민국 제16대 대법원장이다. 물론 이승만이나 박정희처럼 여러 대(代)에 걸쳐 장기집권한 대통령들 때문에 인물 수로만 치면 대통령보다 대법원장 수가 더 많다. 초대 김병로(1948∼1957), 2대 조용순(1958∼1960), 3·4대 조진만(1961∼1968), 5·6대 민복기(1968∼1978), 7대 이영섭(1979∼1981), 8대 유태흥(1981∼1986), 9대 김용철(1986∼1988), 10대 이일규(1988∼1990), 11대 김덕주(1990∼1993), 12대 윤관(1993∼1999), 13대 최종영(1999∼2005), 14대 이용훈(2005∼2011), 15대 양승태(2011∼2017) 전 대법원장이 주인공이다.

역대 대법원장들. 대법원 홈페이지
◆전국 법관 3000명 인사권 등 파워 막강해

대법원장은 사법부 수장으로서 막강한 권한을 갖는다. 장관급 정무직 공무원인 대법관 13명 전원의 임명제청권, 그리고 약 3000명에 달하는 전국 판사들의 인사권이 가장 대표적이다. 제일 중요하고 민감한 사건들을 다루는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재판장 역할을 수행하고 재판과 무관한 사법행정 사무의 지휘·감독권도 행사한다. 사법부 밖에서도 헌법재판소 재판관 3인 지명권,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 3인 지명권, 국가인권위원회 위원 3인 지명권 등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다. 특히 선관위는 대법원장이 지명한 인사가 사실상 중앙선관위원장이 되는 구조다. 대법원장은 또 판검사, 변호사, 법무사, 법원·법무부·검찰청 소속 5급 이상 공무원, 사법연수생 등 3만6000여명의 회원을 거느린 ‘법조협회’의 당연직 회장을 겸한다.

대법원장 임기는 6년으로 대통령(5년)이나 국회의원(4년)보다 길다. 앞서 소개한 것처럼 대통령, 국회의장에 이은 국가 의전서열 3위의 예우를 받는다. 헌재소장(4위), 국무총리(5위), 중앙선관위원장(6위) 등이 그 뒤를 잇는다. 국회의장과 마찬가지로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자리한 공관이 대법원장 전용 숙소로 제공된다. 연봉은 대략 1억3000만원에 이른다.

지난달 열린 사법부 70주년 기념행사에 문재인 대통령과 나란히 참석한 김명수 대법원장(왼쪽). 김 대법원장은 대한민국 제16대 대법원장이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5명 임기 중 낙마… 퇴임 후 극단적 선택도

대법원장이 이처럼 높고 막강한 자리이긴 하나 정치권력과 사법부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격동의 시기나 정권교체기 같은 때에 ‘유탄’을 맞아 임기를 못 채우고 낙마한 사례도 적지 않다. 사법부 70년 역사상 임기만료 또는 정년을 맞아 ‘순조롭게’ 퇴임한 이는 김병로, 조진만, 민복기, 유태흥, 이일규, 윤관, 최종영, 이용훈, 양승태 전 대법원장 9명뿐이다. 이승만정권 시절 임명된 2대 조용순 대법원장은 5·16 쿠데타로, 박정희정권 시절 임명된 7대 이영섭 대법원장은 12·12 쿠데타와 신군부 집권 이후 스스로 물러났다. 전두환정권 시절 임명된 9대 김용철 대법원장은 6월항쟁 이후 민주화 기운이 확산하면서, 노태우정권 시절 임명된 11대 김덕주 대법원장은 문민정부 출범 직후 공직자 재산공개 파문에 떠밀려 역시 법복을 벗었다.

8대 유태흥 대법원장은 재임 중 맨 위에 소개한 법관 인사 관련 파문에 휘말려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발의되는 위기를 겪기도 했으나 어쨌든 임기를 마쳤다. 하지만 ‘사법 암흑기’로 불린 전두환정권 시절 사법부 수장을 지낸 점 때문에 후배 판사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얻지 못해 퇴임 후 외롭고 쓸쓸한 나날을 보내다 2005년 86세의 나이에 극단적 선택을 했다. 이명박정권 말기에 임명돼 박근혜정권과 거의 임기를 함께한 15대 양승태 대법원장은 문재인정부의 적폐청산 수사 과정에서 청와대와의 부당한 유착 정황이 드러나 검찰 소환조사를 앞두고 있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