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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물 차요” 이웃 신고했지만… ‘반지하 일가족’ 안타까운 참변

수도권 115년 만에 물폭탄

발달장애 여성·여동생·조카 3명
이웃들 “창문 뜯어보려 했는데…
119 전화통화도 먹통” 발 동동
집앞 도로 꺼지며 금세 물바다
물 뺀 뒤 진입… 숨진 채 발견

동작서도 반지하 침수 장애인 사망

“아빠, 창문에서 물이 들어와. 빗방울이 들어오는 게 아니라 빗물이 줄줄 새.”

 

서울 동작구에서 1시간 만에 136.5㎜의 물폭탄이 쏟아져 서울의 시간당 강수량 역대 최고치(118.6㎜, 1942년 8월5일)를 경신한 8일 밤 9시. 운전 중이던 전모(52)씨는 9시쯤 20대 딸의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동작구와 맞붙은 관악구 신림동 한 빌라 반지하에 빗물이 새어든다는 전화였다. 그는 운전대를 돌려 집으로 향했다.

9일 간밤의 폭우로 일가족 3명이 사망한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다세대 주택 반지하층이 여전히 물에 잠겨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집에 도착한 전씨는 눈앞 광경에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빗물이 빠른 속도로 반지하방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마치 계곡물 흐르듯 물살이 빨랐다. 곧장 계단 아래로 뛰어 내려간 전씨는 현관문을 열었다. 하지만 열리지 않았다. 집 안에 물이 이미 꽤 찬 상태라 수압 탓에 현관문이 꿈쩍하지 않았다.

 

전씨는 현관문 바로 옆에 있는 창문을 보고선 죽기 살기로 이를 뜯어냈다. 창문을 통해 집 안으로 들어간 그는 20대 세 딸을 차례로 바깥으로 내보냈다.

 

세 딸을 무사히 구한 전씨는 번뜩 옆집도 걱정돼 그 집 창문도 뜯으려고 했다. 이 빌라 반지하엔 전씨 가족을 포함해 2가구가 사는데, 평소 알고 지내던 이웃들이 지금 집 안에 있다면 위험하겠다는 걱정뿐이었다. 빌라 2층에 사는 주민도 내려와 힘을 보탰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쇠창살로 덧댄 이중 방범창이다 보니 성인 남성 2명이 망치를 동원해 열어보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전씨는 “이미 옆집에 물이 많이 찬 상태였다. 어른 몇 명이 더 있었으면 뜯었을지도 모르는데…”라며 말을 흐렸다.

 

전씨 옆집 이웃이 9일 숨진 채 발견된 관악구 발달장애 일가족이다.

지난 8일 내린 많은 비로 서울 관악구에 위치한 한 빌라 반지하가 침수돼 일가족 3명이 갇혀 사망했다. 사진은 9일 서울 관악구에 위치한 사고가 발생한 빌라에 물이 차있는 모습. 뉴시스
지난 8일 내린 많은 비로 서울 관악구에 위치한 한 빌라 반지하가 침수돼 일가족 3명이 갇혀 사망했다. 사진은 9일 서울 관악구에 위치한 사고가 발생한 빌라 주차장에 물이 차있는 모습. 뉴시스

경찰 등에 따르면 이날 0시26분쯤 신림동 이 빌라 반지하에서 여성 A(48)씨와 여동생 B(47)씨, B씨의 딸 C(13)양이 숨진 채 발견됐다. B씨는 전날 집 안으로 빗물이 들이닥치자 지인에게 침수 신고를 해달라고 요청했고, 지인이 오후 9시쯤 경찰에 신고까지 한 것으로 전해졌다.

 

주민들은 당시 상황이 아주 급박했다고 전했다. 빌라에 거주하는 한 주민은 “오후 9시쯤 물이 차올라 119에 계속 전화했는데 대기음만 들리고 연결되지 않았다”고 안타까워했다. 이 주민이 보여준 휴대전화 화면에는 오후 9시3분, 9시6분 등 계속해서 119에 통화 연결을 시도한 기록이 있었다. 다른 주민은 “오후 10시가 되기 전 빌라 앞에 도착했는데 1층은 이미 물바다였다”고 전했다.

 

신고를 접수한 경찰은 빌라에 배수 작업이 필요하다고 보고 소방서에 공동 대응을 요청했다. 경찰과 소방이 배수를 다 한 후 A씨 등을 발견했으나 이미 숨진 뒤였다.

 

당시 빌라로 물이 급속도로 흘러 들어온 건 빌라 앞에 발생한 싱크홀 때문으로 분석된다. 싱크홀에서 물이 솟구쳐 올랐고, 이 물이 지대가 낮은 빌라 쪽으로 빠르게 흘러간 것이다.

 

A씨 등은 모친과 함께 살았다고 한다. 당시 모친은 지병 치료를 위해 입원 중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A씨에겐 발달장애가 있었다. 관악구청 관계자는 “(A씨는) 기초생활수급자로, 다운증후군이 있었다”고 했다.

인명피해 부른 씽크홀 소방대원들이 9일 폭우로 인명피해가 발생한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한 다세대주택 현장을 수습하고 있다. 남제현 선임기자

전씨는 “A씨와 이야기를 해본 적은 없는데, A씨 엄마와는 일주일에 한 번씩 인사하며 이야기를 나눴다”며 “A씨도 활발하게 밖에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곤 했다. 바깥활동을 잘 했었다”고 말했다. A씨 등이 이 빌라에 산 지는 8년 정도 된 것으로 전해졌다.

 

한편, 전날 동작구 상도동에서 주택 침수로 숨진 D(52)씨도 반지하에 살았던 기초생활수급자였던 것으로 확인됐다. D씨와 함께 사는 고령의 모친은 반려견과 함께 집을 빠져나왔으나 D씨는 뒤따라 나오다가 갇힌 것으로 전해졌다. 이웃들에 따르면 D씨에게도 지적장애가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