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스스로 치유하는 과정이 작업이라고 말하는 작가 제유성. 그에게서 작품은 빡빡한 현실에 숨통 구멍을 내는 행위다. 이종덕 기자 |
미술인들이 무엇보다도 중시하는 신기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붓을 들지 않으면 못 배기는 천형 같은 것이다.
화폭 속엔 장난감 같은 물체들이 빼곡히 자리를 틀고 있다. 동심의 나래가 끝 간 데 없이 펼쳐지고 있는 양상이다.
“장난감은 어른 세계의 축소판이에요. 하지만 그 놀이만큼은 순수하지요.”
그에게서 장난감왕국은 치유의 공간으로 자리하게 된다. 현실과의 충돌을 해소하고 소멸시키는 공간이다. 그의 집요하고 편집적인 그림 그리기의 신기는 종국엔 스스로를 치유하는 의식인 셈이다.
“제 작업은 현실 세계에 구멍을 내는 거예요. 일상의 힘겨움과 그렇게 맞닥뜨리는 거지요.”
그가 만들어 가는 화폭 속 세계는 의식의 흐름에 따라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이거다 하는 틀도 없다. 일종의 자가증식이다.
“계속해서 내면에서 터져나오는 대로 ‘붓 화답’을 한다고 보면 돼요.”
그는 캔버스의 특정한 부분에서 그림을 시작하는 법이 없다. 다양한 지점에서 시작되고 마무리가 된다. 계산된 이미지도 없다. 그의 그림에선 전통 민화인 ‘책가도’가 연상되기도 한다. 시점 이동이 그렇다. 눈이 아닌 마음으로 그린 그림이란 얘기다. 책, 서가, 방안 기물 등을 구도화하여 그린 책가도는 조선 유교사회의 문인 취향을 드러내고 있다. 어쩌면 그의 그림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단편적 취향을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제 작업은 곰팡이 포자번식 같은 내러티브라 할 수 있어요. 그림으로 글을 쓰고 있는 거지요.”
화폭 속 세상은 경계도 금기도 없다. 작가는 그 안에서 자유로움을 만끽한다. 마치 아이들이 장난감을 갖고 놀면서 모든 것을 상상하고 구현시키듯이. 그에게서 작업은 유희가 된다.
“궁극에는 사람과 현실에 대한 소통 통로의 구축이라 할 수 있지요. 경계와 경계를 허물고 연결하는 틈새가 주된 관심사죠.”
그의 그림 속에 집과 건물을 연상시키는 반복적 기호들에 문과 창문이 그려져 있는 것이 이를 말해준다. 작가는 무수한 시간 동안 화면을 가득 채워나가면서 현실적 무게를 풀어간다.
“인간 본연의 삶 속 고뇌 등 성숙 과정을 그림에 표현해 보고 싶어요.”
무한히 증식되는 개체들은 화폭 공간의 아우성이 된다. 공간에 마구 쏟아져 나와 떠도는 모습이다.
“셀 수 없을 정도의 개체들은 시선에 쉽게 길들여지거나 복종이 잘 안 돼요. 가시적인 세계로 비가시적인 세계를 역설적으로 보여주고자 했지요.”
그는 절대적인 진리, 신의 세계가 아마도 그럴 것이라 했다. 미술평론가 박영택은 “시선들이 속수무책인 그의 그림 앞에서 독백을 듣는다”고 평했을 정도다.
그의 그림 색채는 중남미 아이티미술을 떠올리게 한다. 대금과 첼로 음악에 어울리는 색의 리듬이다. 원색의 무한증식을 통해 나름의 색을 만들어 내고 있다.
“색은 음식의 간 같은 역할을 하지요. 작가가 자기 색을 가져야 하는 이유죠.”
트렌드에 좌우됨이 없이 나름의 콘텐츠를 갖는 것이 현대 미술에서 점점 중요시되고 있다. 그것이 작가의 정체성이다. 그런 점에서 작가 제유성은 주목을 받고 있다. 22일까지 아트링크 초대전. (02)738-0738
편완식 기자 wansi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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