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에서 20세기 전반은 ‘아름다운 것은 무엇인가’를 탐구했다면, 후반은 ‘무엇이 예술인가’를 추구했던 시기였다. 그러했기에 나름의 통시적 이해의 방식이 있었다. 하지만 요즘 들어 미술이 복잡해진 사회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반영하면서 일관된 이해의 구조를 갖기가 어려워졌다. 난해해진 사회만큼이나 미술이 어려워졌다는 얘기다.
3월28일까지 송은아트스페이스에서 열리는 최선 전은 20세기 미술사가 던졌던 질문들을 다시금 진중하게 되묻고 있다. 작가는 그동안 그런 질문들에 대한 답들이 여전히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털어놓는다 세상은 여전히 모르는 것투성이라고 했다.
그는 미용실과 동물병원 등에서 얻은 개와 고양이 털, 사람의 털을 태워 만든 재를 손에 묻혀 전시장 벽에 문질렀다. 소금이 붙어 있는 캔버스는 지난해 진도 팽목항을 방문해 바닷물에 천을 담그고 말리기를 수십 번 반복해 만든 ‘소금 회화’다. 난지 하수처리장에 모인 오수 위에 생긴 거품의 형태 중 일부를 선택해 회화의 패턴으로 사용한 ‘오수회화’도 있다. 설사약을 먹고 배설한 똥의 모양을 그린 작품도 있다.
우아함은 인간의 야성에서 온 것임을 말해주는 양혜규의 발레인간 조형물. 외피를 모두 방울로 장식해 바람에 소리를 낸다. 절간의 풍경처럼 인간 본성의 깨침 소리다. |
“21세기는 철학적으로도 종교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절대적 가치가 붕괴된 시대다. 젊은 작가로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할 수밖에 없다. 새 프레임을 구축하기 위해 내 나름의 질문을 던져보고 있다.”
그는 한국 미술이 주체적으로 현대성을 획득해 왔는가에 대해 회의적이다. 과거에 대한 반성과 현재에 대한 질문, 그리고 미래에 대한 가능성 제시에 공감하지 못하고 있다.
“세상에 그림 아닌 것이 없다. 흰 옷에 김칫국이 튀면 단색화가 되는 것처럼, 그림에 대한 통념부터 깨야 한다.”
그는 미술이 어려워진 것은 자기 사유에서 시작하지 않아서라고 진단했다.
“질문들이 사라질 즈음에 나도 내 감성에 충실한 그림들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숙제하듯 작업하는 것이 아닌 좋아서, 예뻐서 하고 싶다.”
사실 그동안 미술이 거대담론이나 장식적 요소의 양극단에서 서성거린 것도 사실이다.
“자기 사유에서 바롯되지 않으니 너무 관념적으로 흐르게 된다. 전략적으로, 일종의 숙제 풀듯 해서는 곤란하다.”
5월10일까지 리움에서 열리는 양혜규 전시는 ‘상실의 시대’에 대한 통찰이다. 자연과 인간의 순수한 원초적 본성을 인류공동체가 지켜야 할 본질적 가치로 상정하고 그것의 상실을 환기시킨다. 인간 형상과 토템적 분위기가 전시분위기를 이끌고 있다. 향, 조명, 방울 등의 소재들을 오감을 깨우는 방식으로 구성했다. 발레하는 모습의 조형물 외피는 방울들로 치장됐다. 바람에 흔들리면 ‘들을 수 있는 조각’이다. 우아함과 야성은 뿌리가 같다고 한다. 인간이 잃어버리고 있는 야성, 바로 본성을 깨우게 해 준다. 짚으로 만든 토템적 조형물들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생각하게 만든다. 토템은 인간이 자연과 소통하는 방식이 아니었던가. 블라인드 성채 작업은 또 어떤가. 견고한 성채는 안과 밖을 나누고, 너와 나를 구분하고, 규정하고 구속하고 싸우는 세상에 대한 은유다. 하지만 바람에 흔들리는 블라인드 성채에 빛과 향이 쏟아지면서 판타지가 된다. 소통의 인류공동체가 꽃으로 피어나는 형상이다. 그것이 유토피아가 아닐까 반문하는 것 같다. 바람과 향, 빛이 견고한 성채를 무너뜨린 꼴이다. 소통의 부드러운 힘이다. 후각, 촉각까지 동원해 시각예술의 고정관념까지 깨고 있다.
태현선 큐레이터는 “관람객들이 어렵다는 선입견을 버리면 쉽게 가슴으로 다가서는 전시”라며 “오감을 열어 놓고 전시물을 쉽고 단순하게 바라보라”고 조언한다. ‘뭘 말하려는 것이지’ 하는 작가의 의도에서도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wansi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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