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5년 평안남도 대동군 재경면 빙장리에서 태어난 소설가 황순원은 2000년 9월14일, 산책을 하고 돌아와 서울 사당동 자택에서 평소와 달리 자신의 차례인 저녁 기도를 아내 양정길 여사에게 부탁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그는 숨을 쉬지 않았다. 자는 듯이 세상을 떠나는 일이란 본인은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도 지복이다. 그를 지근거리에서 모셨던 문학평론가 김종회(59) 경희대 교수는 “돌아가신 장면이 그러했듯이 다른 이에게 신세지거나 폐 끼치는 걸 싫어했고 약속은 반드시 지켰으며 자신에게 엄격하고 다른 이에게 관대했던 분”이라고 스승에 대해 말했다.
김 교수가 황순원을 처음 대면한 것은 그가 경희대 입학 면접을 보는 자리였다. 왜 국문과를 지원했느냐는 말에 그는 “영문과보다 쉬워서”라고 답했다고 했다. 국문학개론 첫 수업에서야 그가 결례한 대상이 황순원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난감했다는데, 선생은 그를 다시 대하는 자리에서 그냥 빙긋이 웃기만 했다고 했다.
학보사 기자 생활에 더 충실하면서 언론사 입사를 꿈꾸던 그에게 황순원의 한 마디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대학원에 들어와 공부를 해보라는 스승의 권유에 따라 문학을 좇는 삶의 방향이 정해졌다. 김종회를 포함한 4인방이 늘 황순원 선생을 모시고 다니는 ‘이동비서실’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는 “황순원 선생님은 저에게 문학의 길에서나 인생의 길에서도 아버지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경기 양평군 서종면 수능리 황순원 테마파크 ‘소나기마을’에서 만난 김종회 교수. 그는 “개관 5년 만에 한국 최대 문학명소로 자리 잡은 이곳은 활자가 쇠락하는 시대의 모범적인 문학 공간”이라며 “보다 많은 대중을 문학의 별채에 끌어들이기 위한 새로운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서상배 선임기자 |
북쪽이 고향인 황순원의 고향을 찾아갈 길은 없지만, 한국의 대표적인 소설가로 꼽는 데 누구도 쉬 부인하지 못할 그를 기리기 위한 남쪽 연고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2003년부터 경희대와 양평군이 자매결연을 맺어 콘텐츠를 준비하기 시작한 이래 2006년 기공해 2009년 6월 완공됐고, 이후 5년 만에 연 유료관람객 13만명을 넘어서는 기록을 세웠다. 봉평의 이름난 이효석문학관이 개관 15년째 이르러 연 8만명을 기록한 것에 비하면 괄목할 만하다. 올봄 소나기마을 촌장으로 취임한 그는 양평 황순원문학관 창가에서 말했다.
“갈수록 종이책으로만 대중에게 소구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런 공간은 의미가 큽니다. 황순원이라는 이름과 ‘소나기’가 지닌 명성에다 각종 콘텐츠를 충실하게 꾸린 점, 수도권과의 근접성이 이곳을 국내 최대 문학 명소로 만든 요인들일 겁니다. 이제는 제2의 도약을 기약할 때입니다. 이대로도 사람들은 여전히 이곳에 오겠지만, 국민 명소로 만들기 위해서는 새로운 노력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지자체들이 연고가 있는 유명 문인들을 매개로 경쟁적인 사업을 벌여 왔다. 대중의 호응을 얻지 못한 채 예산 낭비라는 비난을 받으면서 흐지부지 끝나는 사례가 많다. 전국적으로 문학관만 60여개가 난립하는 상황이다. 문학관 자체야 비난받을 소지가 없지만, 문제는 콘텐츠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은 껍데기 조형물로 그치는 경우가 태반인 현실이 안타까운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소나기마을’의 성공은 각별히 들여다볼 만한 사례다.
소나기마을이 어느 한 개인의 노력만으로 이루어낼 수 없는 성과임은 자명하다. 경희대와 양평군이 자매결연을 맺었고, 많은 연구자들이 참여한 콘텐츠 생산과 지자체의 하드웨어 지원이 원만하게 이루어지는 과정이 순탄하게 진행되려면 숨은 노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 매개 고리의 핵심 동력이 그이였던 셈이다. 김 교수는 경남 하동에 이병주문학관도 추동해 제대로 자리 잡게 만들었다. 보통 에너지로는 힘든 맥락이다.
학보사 기자 시절 경희대 조영식 이사장의 눈에 띄어 대학원 석사과정 무렵부터 통일부 관련 ‘일천만이산가족재회추진위원회’ 사무총장에 이어 2년간 ‘통일문화연구원’ 원장 직책을 수행했다. 이때부터 남북문제 현장에서 일한 기간이 1983년부터 2005년까지 무려 22년에 달했다. 북한 관련 자료 열람이 자유로운 처지에서 북한문학 관련 연구서를 펴냈고, 북한문학을 포용하기 위해서는 한민족문화권의 문학으로 접근해야 된다는 맥락에서 해외동포문학에 집중했다. 그 결과 ‘한민족 디아스포라 문학’에 대한 집중적인 성과를 이루어낼 수 있었다.
“해외 동포문학을 한국문학이냐 아니냐는 ‘가부(可否)’의 판단이 아니라 ‘정도(程度)’의 문제로 판단해야 된다고 봅니다. 김석범의 ‘화산도’가 일본어로 쓰여졌다고 해서 한국문학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제주도를 무대로 한 재일교포의 글쓰기란 차원에서 어느 정도 한국문학적 요소가 있느냐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글로벌시대 문학을 포괄적으로 생각하는 게 필요합니다.”
“다른 쪽으로 관심이 분산되지 않았으면 시나 소설을 썼을 겁니다. 나를 알고 있는 친구들은 너는 하고 싶은 게 많아서 못 썼을 거라고 말하긴 하지요. 지나고 보니 아쉬움도 많습니다. 너무 여러 가지를 하는 바람에 집중력이 떨어진 면이 있지요. 다시 되돌아간대도 결국 했던 대로 했을 것 같습니다.”
그가 대학 내외에서 맡고 있는 직책은 10가지를 훌쩍 넘는다. 왜 이리 바쁜 것이냐고 물었을 때 그이 또한 난감한 표정으로 “이제 정년을 5년 남겨둔 시점에서 삶의 본질적인 부분만 건드리는 글만 쓰고 싶다”고 말했다. 어린 시절 그의 집에는 방물장수 같은 떠돌이 과객이 늘 끊이지 않았다고 했다. 모친은 남자들은 행랑채에서 자게 하고 여자들은 자녀들이 자는 방에서 함께 재웠다고 했다. 그것, 사람들을 소중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그 에너지야말로 사람들을 움직여 일을 조직하고 변방의 문학까지 포용하게 만드는 바탕인 셈이다. 그는 “비평이란 재단하기에 앞서 작가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그가 무엇 때문에 그 작품을 썼는지 따라가는 자세가 우선 필요하다”고 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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