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미국계 의료기기 업체인 A사는 툭하면 국내 종합병원 의사들을 하와이·싱가포르·태국으로 초청했다. 해외에서 제품설명회나 학회를 연다는 명목이었지만, 실제 일정은 골프와 관광 접대가 대부분이었다. 최근 2년 2개월 동안 A사로부터 이런 식의 접대를 받은 의사는 74명에 달했다.
#2. 국내 제약업체 B사는 2010년 9월부터 2011년 6월까지 시장조사 설문응답이나 논문 번역 수고비조로 거래처 의사 461명에게 1인당 최대 360여만원을 지급했다. 의사들은 해당 프로젝트에 참여한 적이 없었지만 B사는 마치 의사가 번역한 것처럼 논문을 조작하거나 설문지를 가짜로 꾸몄다.
“동료 교수도 해당 교수에게 리베이트 자꾸 받다간 탈난다고 경고했었어요.”
이는 지난 8월30일 검찰이 발표한 의료계 리베이트 사건과 관련, 불구속 기소된 경기도 모 대학병원 의대교수에 대한 같은 병원 동료 교수가 전한 말이다.
이날 서울서부지방검찰청 정부합동 의약품 리베이트 수사단은 경기도 소재 모 대학병원 교수가 2012년 3월 16일부터 2014년 10월 17일까지 15회에 걸쳐 7개 제약사들로부터 약 2028만원 상당의 리베이트를 받아 불구속기소됐다고 밝혔다. 이 중 6곳은 국내 제약사이고 1곳은 다국적제약사이다.
검찰은 지난해 말 리베이트 수수혐의로 이 교수의 연구실을 압수수색했다. 신고에 따른 수사로 알려진 가운데 결국 꼬리가 길어 덜미가 잡힌 것이다. 동료 교수도 이미 해당 교수가 리베이트를 받는 사실을 건너 들었다는 전언이다. 이에 따라 이미 내부적으로는 일부에 관련 내용이 알려졌었던 것으로 관측된다.
같은 병원 내 한 교수는 “다른 동료 교수가 해당 교수에게 리베이트를 받지 않는 게 좋겠다고 했지만 결국 이러한 사단이 났다”며 “좀 자주 받는 것 같다는 얘기는 있었다”고 전했다.
이 교수의 담당 영업사원이 속한 모 제약사 관계자도 “담당 영업사원이 해당 교수가 리베이트를 요구해 난처했었던 것으로 알고 있으며 결국 주진 않았다”고 말했다.
검찰 조사결과에 따르면 해당 교수는 자료가 남지 않는 현금을 받거나, 제약사 영업사원이 술값·식대를 미리 결제해 놓으면 따로 돈을 내지 않고 이용했다. 또 영업사원으로부터 신용카드를 받아 사용하는 등 은밀한 행위를 이어갔다.
해당병원은 결국 검찰 압수수색 이후 교수들을 대상으로 리베이트 관련한 의료윤리 교육을 의무적으로 시행한 것으로 확인됐다.
의약품의 최종 사용자는 환자이지만 선택권은 의사에게 있다 보니, 일반적으로 의료계는 의사와 제공자인 제약사 간 이른바 ‘갑(甲)-을(乙)’의 관계가 형성된다. 특히 교수 처방권의 힘은 지난해 7월부터 시행됐던 리베이트 투아웃제를 뛰어 넘을 만큼 강력했다.
이번 사건도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 있다. 검찰 측은 “일부 의사들이 여전히 불법적인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적극적으로 리베이트를 요청하는 사례까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 엄단하게 됐다”고 밝혔다.
리베이트 투아웃제는 불법 리베이트 1회 적발 시 최대 해당 품목 1년간 급여 정지, 2회 적발될 경우 보험급여 퇴출이 가능토록 한 제도다. 약값의 일부가 여전히 리베이트로 사용되고 있는 비정상적인 업계 상황을 고려해 만든 가장 강력한 리베이트 억제 장치다.
그중에서도 급여 퇴출은 그 급여만큼 고스란히 환자 비용부담으로 전가되기 때문에 해당 약제로선 사망선고나 다름없다. 리베이트가 제공되는 이유는 시장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으로 환자는 해당 약제 대신 보험적용이 되는 다른 제네릭이나 비슷한 작용기전의 오리지널 약제를 처방 받으면 된다. 이번 사건을 통해 리베이트 투아웃제 적용을 받게 되는 곳은 7곳 중 총 5곳이다.
그럼에도 리베이트를 제공한 이유는 의사들의 처방 보복이 두렵기 때문이란 게 제약업계 시각이다.
실제 앞서 리베이트 사건이 적발되면서 의사들의 공분을 샀던 몇몇 제약사들의 실적이 크게 떨어지는가 하면 어떤 제약사 직원은 리베이트 재판 과정에서 미래를 위해 의사를 두둔하는 해프닝도 낯설지 않은 실정이다.
이번 사건의 경우는 단 한 명의 교수와 직결된 일이지만, 실적을 내야하는 영업사원이나 제약사로서는 대학병원은 큰 거래처다. 특히 대형 품목이 끼어있으면 더욱 그러하다.
제약업계 한 관계자는 “각 사들이 가장 피하고 싶은 건 ‘무(無)처방’”이라며 “제약사간 경쟁이 심하면 의사가 요구하지 않아도 리베이트를 주는 경우가 있지만, 교수가 직접 요구하면 고민의 여지가 없는 경우가 많다”고 토로했다.
이어 “요즘은 제약사들도 서로 자정의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요구가 들어오면 흔들리는 경우가 많을 수 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검찰은 이번 사건과 관련 해당 교수에 대해 행정처분을 의뢰했다. 리베이트 쌍벌제 적용으로 수수금액에 따른 일정기간 의사 면허정지 처분이 이뤄질 것으로 관측된다.
김현주 기자 hj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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