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묘지를 참배하는 장병들(자료사진) |
“둘을 죽인다고 독립이 되냐고? 모르지…. 그치만 알려줘야지. 우린 계속 싸우고 있다고…”
지난 7월 중순 개봉 후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암살’의 명대사 중 하나다.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관과 친일파를 처단하기 위해 경성에 잠입한 안옥윤(전지현)에게 하와이 피스톨(하정우)이 “그 둘을 죽인다고 독립이 되나”라고 물은데 대한 대답이다.
사실 암살을 한다 해서 바로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일본은 후임 사령관을 보내면 그만이고, 친일파 강인국(이경영)의 빈자리를 메울 사람들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하지만 일제에 맞서 싸우고 있다는 것을 세상에 알림으로서 동포들에게 희망을 주고 국제사회의 여론을 환기시킬 수 있다는 측면에서 당시 암살은 가장 효율적인 독립운동 방식 중 하나였다.
암살 외에도 일제 치하에서는 외교 활동, 계몽 운동, 군자금 모금 등 다양한 방식으로 항일 운동에 참여한 수많은 순국선열들이 있었다.
그들 덕분에 1945년 광복을 맞았지만 지금 남북으로 분단된 조국이 순국선열들이 바라던 이상적인 조국의 모습일까.
◆순국선열의 날=을사늑약 체결일
17일은 순국선열들을 기리는 ‘순국선열의 날’이다. 그런데 이 날이 을사늑약이 체결된 날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순국선열의 날은 1939년 11월 21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이 11월 17일을 ‘순국선열공동기념일’로 제정한 것에서 비롯됐다. 11월 17일을 기념일로 선택한 것은 1905년 11월 17일에 체결된 을사늑약을 잊지 말자는 의미에서였다.
8.15 광복 이전까지는 임시정부가 순국선열의 날을 기렸다. 광복 이후부터 6.25 시기까지는 민간단체가 기념행사를 주관했다. 당시 기념식에는 김구, 이승만 등 사회 지도자들이 참석했다.
1955~1969년에는 정부 주관으로 진행되다 1970년부터는 정부 행사 간소화 조치로 인해 공식 행사는 현충일에 포함되어 거행되었다. 1997년 국가기념일로 제정되면서 다시 정부가 주관하는 행사가 되었다.
17일 열리는 제76회 순국선열의 날 기념식에서는 구한말 의병운동에 참여한 곽한소 선생 등 67명이 새로이 포상을 받는다. 이번에 발굴된 67명을 포함해 광복 이후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은 사람들은 1만4264명에 달한다.
작년 5월29일 중국 시안에 세워진 광복군 제2지대 표지석. 사진=국가보훈처 |
곽한소 선생은 구한말 애국지사인 면암 최익현 선생의 제자로, 스승이 작성한 항일 격문에 이름을 올리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성토하는 글의 초안을 썼다.
충남·전북 지역에서 의병운동에 투신한 곽 선생은 거듭된 패전에도 군자금을 모아 무기를 사들이고 잔여세력을 규합하는 등 재기를 위해 노력했다.
한편 올해 순국선열의 날 기념식에는 황교안 국무총리를 비롯한 정부 주요 인사, 독립유공자 유족, 독립운동 관련 단체장 등 1000여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 분단된 조국, 분단된 기억
영화 ‘암살’에는 김구와 김원봉이라는 독립운동사의 두 거목이 등장한다.
김구는 누구나 기억하는 독립운동가이자 존경받는 위인이지만 ‘의열단’을 이끈 김원봉은 영화 개봉 이후에야 재조명을 받았다.
김원봉은 일제가 거액의 현상금을 걸고 추적할 만큼 일본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1919년 12월 의열단을 조직한 그는 요인 암살 등 무정부주의적 투쟁을 선도했다.
1925년 황푸군관학교를 졸업하고 1935년 조선민족혁명당을 지도하면서 중국 관내지역 해방운동을 주도했다. 1942년 광복군 부사령관에 취임하였으며, 19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 및 군무부장을 지내다 광복 후 귀국했다. 1948년 남북협상 때 월북했으나 1958년 11월 숙청됐다. 이 때문에 김원봉은 남북한 모두로부터 외면당했다.
김원봉의 사례는 분단이 우리의 역사적 기억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다. 남측에서도, 북측에서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수많은 순국선열들과 이념에 따라 동일한 독립운동이 다르게 기술되는 것은 분단이 남긴 비극일 것이다.
DMZ를 경계하는 장병들(자료사진) |
비단 역사적 사실만이 아니다. 수천년 동안 사용해온 우리말과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도 이질화가 심각해지고 있다. 남북한 주민들의 체격도 급격히 달라지면서 “분단이 오래 지속되면 ‘북한인’과 ‘남한인’이라는 별개의 민족으로 갈라지는 게 아니냐”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북한 군사적 대치는 격화되고 있다. 지난 8월 북한의 비무장지대(DMZ) 지뢰도발과 포격 도발은 한반도 정세를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으로 몰고 갔다. 우리 군은 11년만에 대북 확성기 방송을 재개했고, 북한은 준전시상태를 선포하는 등 ‘강 대 강’ 대치를 이어갔다. 비록 8월 25일 남북 고위급 접촉으로 군사적 긴장은 해소됐지만, 북한의 미사일 발사나 핵실험 같은 도발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다.
일제시대 순국선열들이 피와 땀을 바쳐 항일운동을 펼친 이유는 한민족이 하나가 되어 광복을 맞이하자는 뜻이었지 분단된 한반도에서 서로 대치하는 상황은 아니었을 것이다. 서로 갈라진 기억을 한데 모아 항일운동을 펼친 순국선열들을 기리는 것은 분단을 넘어서 통일로 가는 첫 걸음이 될 것이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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