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미군 탄저균 배송사건을 조사하기 위한 한미합동실무단이 8월 6일 사고현장인 경기도 평택 주한미군 오산기지 내 생물식별검사실에서 공동조사를 하고 있다. 평택=사진공동취재단 |
스텔스(Steath). 상대의 레이더, 적외선 탐지기, 음향탐지기 및 육안에 의한 탐지까지를 포함한 모든 탐지 기능에 대항하는 은폐 기술을 말한다.
스텔스 기술을 적용하면 적 함정이나 항공기의 레이더는 아군을 제대로 탐지하지 못해 그 활동을 추적하기 어렵다. 미 공군의 F-22와 F-35가 공중전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는 것도 스텔스 기술에 힘입은 바 크다.
문제는 ‘스텔스화’가 잘못 적용될 때다. 적의 눈을 가려야 할 스텔스가 아군까지 속이는 역할을 한다면 없느니만 못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지난 5월 주한미군 오산기지에 사균화되지 않은 탄저균 샘플이 반입된 사고는 ‘한국 속의 미국’이라 불리는 주한미군이 북한은 물론 우리측의 눈도 가릴 수 있는 ‘스텔스 군대’로 바뀌어가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 ‘탄저균 반입’ 주한미군, 사전 통보 없었다
탄저균 배달사고를 조사한 한미 합동실무단은 17일 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주한미군은 탄저균, 페스트균을 국내에 반입하는 과정에서 이 사실을 한국측에 통보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지난 4월 24일 미 에지우드 화생연구소는 사균화된 탄저균과 페스트균 검사용 샘플(각 1㎖)을 주한미군 오산 기지로 발송했다.
이 샘플은 국제항공운송협회(IATA) 규정에 따라 3중 포장돼 페덱스에 의해 같은달 26일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이후 세관에 ‘주한미군용’으로 수입신고되어 29일 오산기지로 배송됐다.
이 과정에서 주한미군은 샘플 반입 사실을 한국에 통보하지 않았다.
화생방 제독훈련중인 미군(자료사진) |
합동실무단 관계자는 “해당 샘플은 ‘비활성화된 탄저균, 페스트균’이라고 적혀있었다”며 “규정상 사균화된 병원체는 민간에서도 신고 없이 수입할 수 있고, 일반적으로 주한미군 물품은 바로 통관된다”고 설명했다.
샘플을 받은 오산기지측은 생물검사실 내 생물안전작업대에서 이를 개봉해 희석처리했다. 희석된 샘플은 5월 20일과 26일 생물검사실에서 훈련과 장비 성능 시험을 위해 사용됐다.
사용된 샘플은 고압 멸균해 폐기됐으나 27일 미 국방부의 폐기 지시에 따라 남은 샘플도 8.25% 차아염소산나트륨 용액에 침수시켜 제독 후 폐기했다.
주한미군측은 탄저균 노출 가능성이 우려된 22명의 미군 장병들에게 백신과 항생제를 투여했으며, 감염증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합동실무단은 조사 과정에서 주한미군측이 2009~2014년까지 15차례에 걸쳐 사균화된 탄저균 샘플을 반입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 샘플들은 서울 용산기지에서 시험용으로 쓰였다.
합동실무단 관계자는 “용산 기지 내 병원에서 시험이 진행됐으며, 현재 이 시설은 남아있지 않다”며 “오산에서는 올해 처음으로 시험이 이루어졌다”고 설명했다.
◆ ‘한국 속의 미국’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몰라
주한미군의 탄저균 배송 사실을 정부가 알 수 있는 법적 장치들은 제대로 가동되지 못했다. 인천공항을 통해 들어온 탄저균 샘플을 검사해야 할 관세청은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에 따라 샘플을 통관시켰다.
SOFA 제9조(통관과 관세)는 미 군사화물에 대한 세관검사를 면제하고 있다. 제26조(보건과 위생)에는 위험물질 반입 시 사전통고나 허가 같은 내용은 들어있지 않다.
때문에 5월 27일 주한미군이 미 국방부의 지시에 따라 샘플을 폐기할 때까지 시험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주한미군이 2009~2014년까지 15회에 걸쳐 사균화된 탄저균 샘플을 반입해 시험했다는 것도, 2013년부터 주한미군사령부가 생물방어용 ‘주피터 프로그램’을 도입한 것도 탄저균 배달사고 전까지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이는 ‘한국 속의 미국’인 주한미군의 정책적 방향에 대한 모니터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의미다.
군 관계자는 “한미연합사에 근무하는 한국군 장교들도 미군 장교들의 움직임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한국군 장교가 업무 중인 미군 장교에게 다가가면 노트북을 덮어버리기도 한다”고 전했다.
사실 우리가 주한미군과 함께 50여년을 함께 지냈지만 그 존재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의외로 적다. ‘주피터 프로그램’처럼 한반도 안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도 모르고 지나칠 수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주한미군 병력의 순환배치나 기지 이전 등은 공개되고 있지만, 장비 배치 등 상당 부분은 두꺼운 베일 속에 가려져 있다. 특히 오산 미 공군기지를 통해 드나드는 미군 장병과 민간인들의 신원 등에 대해서도 파악이 어려운 측면이 있다.
박격포 발사 훈련중인 한미 육군 장병들(자료사진) |
이는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과 맞물려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전략적 유연성이란 해외주둔 미군을 필요한 때 다른 분쟁지역으로 차출될 수 있도록 재편한다는 뜻이다. 즉, 주한미군이 우리의 의사와 관계없이 미국 정부의 명령을 받아 상당한 수준의 비밀작전을 수행해도 모를 수 있다는 것이다.
주한미군은 한반도 방위에 있어 필수전력이다. 하지만 부대 운영을 우리가 면밀하게 파악하지 못한다면 ‘스텔스 미군’의 활동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해 한미 양측은 17일 오후 신재현 외교부 북미국장과 테렌스 오샤너시 주한미군 부사령관이 참석한 가운데 한미 SOFA 합동위원회를 열어 주한미군이 생물학 검사용 샘플을 한국에 반입하는 절차를 마련해 안전조치를 강화하는 내용의 권고안에 합의했다.
이를 계기로 주한미군의 활동에 대한 투명성과 모니터링 강화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어 한미 양측의 향후 대응이 주목된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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