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의 효율성 명분 왜곡해서 수용
대한체육회 인적쇄신 유일 해법
스포츠 패러다임 대수술 급선무
국제대회 성적지상주의도 문제
정부차원 체육정책 재검토 필요
답답함과 좌절. 체육계 폭력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만나 본 전문가들에게서 느끼는 공통된 정서다. 이는 고 최숙현 선수의 비극적 선택으로 밝혀진 최근 사건에서도 마찬가지. 해묵은 체육계 폭력 악습의 해결책을 묻기 위해 만난 4명의 전문가들도 비슷한 답답함을 털어놨다.
“매번 같은 대책을 내놓아야만 하니 이야기하는 입장에서도 민망하다”는 답변까지 돌아왔다. 이해가 가는 반응이다. 불과 1년 6개월여 전인 지난해 1월 전 쇼트트랙 여자 국가대표 심석희, 여자 유도선수 출신 신유용의 ‘미투’ 폭로로 체육계 개혁의 목소리가 커졌고, 이 과정에서 국내 체육계의 문제에 대한 수많은 진단과 대책이 나왔기 때문이다. 당시 사건 이후 정부가 스포츠혁신위원회를 꾸려 지난해 5월부터 8월까지 3개월간 7차에 걸쳐 권고안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반성과 대안들이 또다시 공허한 메아리가 됐다.
◆개혁의지 부족한 체육계
게다가 이번 최숙현 선수 사망 이후 또다시 비슷한 대안들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어쩔 수 없다고 입을 모은다. 같은 상황이 반복되니 같은 대책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 유상건 상명대 스포츠ICT융합학과 교수는 “현 시점의 체육계에서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요소들이고, 꼭 필요한 프로세스라서 비슷한 대책이 나올 수밖에 없다”며 “사실 지난해 혁신위 권고안만 잘 이행됐어도 이런 비극은 없었다”고 단언했다. 함은주 문화연대 집행위원도 “많은 고민을 통해 내놓은 대책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으니 다시 반복해서 나올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결국, 문제는 체육계의 개혁의지 부족이라는 한 개의 꼭짓점으로 모인다. 최동호 스포츠문화연구소장은 “이전 사건을 수습할 때 약속했던 개선방안들이 제대로 지켜졌느냐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체육계가 문제 지도자 및 선수의 삼진아웃제, 영구제명 등 여러 가지 대책을 천명했지만 제대로 정착된 것은 없다”는 것이다. 유상건 교수도 “현장이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며 “그동안 해왔었던 방식이고, 특히 메달을 따는 등 성공도 했으니 상당수의 체육계 구성원들이 암묵적으로 기존 관행 유지를 밀어붙인 부분이 있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대안들이 체육계에 수용되는 과정에서 변질되는 일도 허다했다. 함은주 집행위원은 “체육계 구성원들이 개혁 대안들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취지나 원칙을 현장의 효율성이라는 명목하에 왜곡해서 수용했다”고 비판했다. 이 과정에서 체육계 내부의 자성과 비판은 없었다. 하키선수 출신으로 현장의 목소리를 꾸준히 들어온 함 집행위원은 “성과와 대중적 영향력을 갖춘 선수라 하더라도 이미 공고한 체육계 카르텔 속에서는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며 앞에 나서기 힘들다”면서 “이미 체육계는 의견이 다른 몇몇이 생각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는 구조”라고 밝혔다.
◆대한체육회 인적쇄신 절실… 체육 패러다임 대수술도 이어져야
당연히 체육계 개혁을 제대로 이끌지 못한 대한체육회의 책임론이 도마 위에 오를 수밖에 없다. 이용식 가톨릭관동대 스포츠레저학과 교수는 “지난해 혁신위가 체육윤리센터 설립을 권고하고 법안 통과 후 윤리센터 본격 활동 전까지 1년여 동안 대한체육회에게 기존 시스템의 개혁을 요구했는데 이루어진 것이 거의 없다”면서 “결국 이 공백기간 동안 이번 사건이 발생했다”고 아쉬워했다.
최동호 소장은 “이번 최 선수 관련 비극뿐 아니라 과거 여러 사건을 통해 스포츠를 바라보는 국민들과 체육계의 눈높이가 전혀 다르다는 것이 입증됐다”고 말한다. “사실 이는 대중의 지지를 먹고사는 한국 스포츠의 최대 위기”라면서 “이 같은 위기를 감지하면 대한체육회가 가장 먼저 나서 새로운 패다임을 제시하고 변화의 주도권을 잡아야 하는데 현재는 그러한 능력과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최 소장은 “이 같은 상황 속에서 대한체육회는 사고를 수습하고 외부 비판을 의식한 대책을 내놓는 데에만 급급할 수밖에 없다”며 “진정성 없이 내놓은 대책으로는 우리 체육계의 심각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만큼, 대한체육회 등 관련기관의 인적쇄신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덧붙였다.
이와 함께 여전히 구시대적인 한국 스포츠 패러다임의 대수술도 절실하다. 이용식 교수는 “한국스포츠는 군사독재시절 국제대회 입상을 위해 국가가 지자체 등에 선수 육성을 대행시켰던 구시대적 구조를 현재까지 유지해오고 있다”고 일침을 가하며 “어린 선수는 학교운동부에, 성인선수는 주로 지방자치단체에 맡겨놓고 국가는 오직 이들이 국제대회에서 어떤 성적을 내느냐에만 관심을 가진다”고 비튼다. 이 교수는 “전국체전은 이런 구시대적 선수 육성 시스템 속에서 지자체들을 경쟁시켜 최고 효율을 거두기 위한 수단”이라며 “이런 환경 속에서 선수들의 평가는 오직 국제대회나 전국체전 등의 결과를 통해서만 이루어지고, 선수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는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함 집행위원도 “심지어 체육정책을 총괄하는 문화체육관광부조차도 스포츠를 평가하는 지표가 대회 성적밖에 없다”면서 “이 단 하나의 지표로 성과를 내려면 다른 부분은 눈감을 수밖에 없어, 인권의 사각지대가 계속 생겨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부 차원에서 기존 스포츠정책 방향부터 재검토해야 한다는 의견도 강하다. 유상건 교수는 “한국은 늘 스포츠선진국이 되겠다는 목표를 가져왔지만, 과연 올림픽 메달 몇 개, 10위권 유지 등이 선진국다운 캐치프레이즈인지 고민해 봐야 한다”며 “스포츠인권 등도 적극적으로 챙겨 일반 국민들이 대표선수들의 경기를 볼 때 환호하며 기뻐할 뿐 아니라 승부나 메달에 관계없이 ‘우리 모두의 스포츠’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필웅 기자 seose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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