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광복 이후 격동의 세월 견딘
경북 안동 김씨댁 아홉 여인네 이야기
올해 창립 70주년인 국립극단. 그 어느 때보다 풍성한 잔칫상을 내놓으려 했으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사태 때문에 어그러졌다. 그래도 올해 농사에서 거둔 알찬 수확이 있다면 ‘화전가(花煎歌)’다. 삼십년 후 발간될 국립극단 100주년사에 2020년은 이 작품이 초연된 해로 기록된다.
‘화전가’는 한국전쟁 발발을 두 달 앞둔 1950년 4월 경북 안동 김씨댁 아홉 여인네 이야기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 격동의 세월을 묵묵히 견디며 집안을 지킨 김씨 할머니와 여인들 사연이 날실과 씨실처럼 교차하며 무대를 채운다.
쉼 없이 두시간 이십분 이어지는 공연을 관통하는 정서는 ‘노스탤지어’다. 화전놀이와 경신수야(庚申守夜) 등 지금은 잊힌 풍물과 기억에 대한 그리움과 아쉬움이 가득하다.
표준어가 보급되면서 사라지고 있는 방언도 그중 하나다. 같은 경북이래도 대구 지역의 ‘∼했능교?’대신 ‘∼니껴?’라고 묻곤 했던 안동 일대 동남방언이 무대 위에서 배우들 대사로 살아난다. 가령 화전놀이 풍속을 모르는 막내딸 봉아에게 나이 지긋한 행랑할멈은 이렇게 가르쳐준다. “집안 어른들, 액씨들, 동기 간에 시집간 액씨들꺼정 다 모이가 이삐게 단장허고, 꽃매이 채리입고 나가니더, 나가가 바람도 시컨 쎄고 꽃도 보고 꽃지지미도 부치가 농가 먹고 노래도 하고 춤도 추꼬, 그래 일년에 딱 하루 놀다 오는 게래요….”
이제는 낯선 말이 된 동남방언이 극 이해에 어려움을 줄 성 싶기도 하다. 하지만 실제 극장에선 잠시 적응할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낯선 말이지만 뜻을 넉넉히 헤아리게 되는 경험에서 방언 역시 모국어임을 실감하게 된다. “지역성 강한 사투리가 의미 전달 기능에선 방해되나 ‘말’은 의미를 전달하는 기능만 갖는 게 아니다. 사투리 자체가 가진 음악성과 아름다움은 단순히 장식적 요소뿐만 아니라 전체적 틀 안에서도 중요하다”는 ‘화전가’ 작가 배삼식 설명대로다.
무대는 김씨 환갑을 축하하기 위해 식솔이 모이며 시작된다. 다가오는 전란을 감지하면서도 그저 일상을 이어가며 안녕을 기원할 수밖에 없는 김씨댁 여인들은 삼팔선 이북, 감옥소 등으로 뿔뿔이 흩어진 남정네 빈자리가 드러날 환갑잔치 대신 화전놀이를 떠나기로 마음먹고 마침 ‘경신(庚申·60갑자 중 57번째 일진)’인 밤을 옛 풍속대로 이야기꽃으로 지새운다.
월북한 남편을 둔 첫째 딸, 시류에 잘 올라탄 남편을 둔 둘째 딸, 첫사랑에 설레는 막내딸과 이른 사별을 겪어야 했던 첫째 며느리, 사상범 혐의로 수감된 남편을 둔 둘째 며느리에 만주에서 만난 남정네 대신 김씨댁을 택한 독골할매와 온갖 풍파를 겪은 홍다리댁, 그리고 청상과부로 늙은 고모 등의 이야기가 오색 비단처럼 펼쳐진다.
촘촘한 서사와 인물 구성은 마치 ‘토지’같은 대하소설의 마지막 권을 드라마로 보는 듯하다. 그중 사소하지만 아름다운 장면은 마음속에 남는다. 아홉여인이 모여 둘째 딸이 선물로 들고 온 낯선 신문물 커피를 마시고, 백설탕 단맛에 한껏 즐거워하는 대목도 그중 하나다. 직접 연출을 맡은 국립극단 이성열 예술감독이 공들여 아름다운 순간으로 만들었다.
끝 무렵 김씨와 첫째 며느리의 대화도 인상적이다. 무대와 매체를 가리지 않고 좋은 연기를 보여온 배우 예수정은 속 깊은 시어머니의 어려운 결단과 배려를 보여줬다. 며느리로 분한 이도유재는 정을 끊어야 하는 차마 어쩔 수 없는 신세를 슬퍼하는 연기로 호응했다.
김씨와 같이 늙어가는 고모 권씨 역의 전국향 등 모두 여성인 다른 출연진도 균형잡힌 좋은 연기를 선보였다. 독골할멈을 맡은 김정은과 그의 딸로 나온 박소연의 감칠맛 나는 연기는 자칫 지루해질 뻔한 무대의 수훈상감이다. 미리 대본을 읽었을 때 머릿속에 그려진 인물상 그대로다. 배우 이다혜의 막내딸 연기도 무대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국립극단이 ‘큰 기대를 걸어도 좋다’던 ‘화전가’의 의상과 무대도 제 몫을 톡톡히 했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과 영화 ‘해어화’ 등에서 다양한 한복을 선보여 온 디자이너 김영진은 이번 무대에서도 일상복에서부터 꽃놀이를 위한 외출복 등에서 모자라지도 과하지도 않은 우리 한복이 가진 아름다움을 선보였다.
무대디자이너 박상봉의 간결하지만 감각적인 무대는 물길까지 끌어들였다. 안동 한옥 대청마루에서 집 앞 개울, 뒷산 무너진 절터까지 자유자재로 변하며 객석에 감성을 더했다.
작가 배삼식은 일제강점기 시절 예술인들의 삶을 다룬 ‘적로’와 광복 직후를 다룬 ‘1945’에 한국전쟁 직전을 다룬 이 작품까지 근현대사를 훑어내려 오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중대한 의미를 두고 다투는 시대의 사소하고 무의미한 것들에 관해 얘기를 하고 싶었다. 고통스러운 순간 속에서도 아름다운 존재를 무대 위에 보여드리고 싶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작가 의도대로 ‘화전가’는 지나간 시대의 사소했지만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가득하다. 우리말로 ‘향수(鄕愁)’가 될 법한 옛것, 떠나온 것에 대한 그리움을 뜻하는 노스탤지어는 사전을 펼쳐보면 고국·가족과 떨어져 살아야 하는 스위스용병 등의 정신적 고통과 불안감을 표현하기 위한 의학논문 용어로서 17세기에 처음 사용됐다. 이후 근대에 와서야 여러 긍정적 의미가 부여되면서 의학서적이 아닌 시에 등장하는 단어로 변신했다. 좋은 기억에 대한 그리운 감정을 일으키는 건 기분 전환에 도움이 되며, 사회적 유대감을 키우고, 자아성장과 자기 실존에 대한 인식을 강화할 수 있다고 한다. ‘화전가’를 보고 난 후 무언가 글로는 적기 힘든 감정의 흐름을 경험하며 관객이 챙겨갈 수 있는 것들이다.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8월 23일까지.
박성준 기자 alex@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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