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감 묻은 돌이 캔버스 왼쪽 끝에서 한번, 또 한 번 물감 묻은 돌이 캔버스 오른쪽 끝에서 한번……. 백발에 허리가 굽은 노화백이 고집스럽게 반복한다. 그렇게 한 번씩 돌멩이가 자신의 자취를 남기기를 1000번 채우면 작품은 완성된다. 최상철 화백의 ‘무물(無物)’ 시리즈다.
서울 종로구 통의동에 위치한 아트스페이스3에서 최상철 작가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최상철 작가는 1969년 서울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1970년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 서울특별시장상을 받은 이래로 1970년대부터 50여년간 꾸준히 추상 작업을 발전시켜온 작가다. 1999년부터는 붓을 사용하지 않고, 다른 도구를 통해 작품을 완성하는 다양한 실험을 해 왔다. 이번 전시에서 최근 3년간 작업한 작품 14점을 선보이고 있다.
그가 선보이는 무물 시리즈 역시 붓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아이스크림에 심긴 조그만 나무막대기 양 끝에 좌(左), 우(右)를 써넣고 공중에 던진다. 바닥에 떨어진 막대기 표시대로 때로는 캔버스의 왼쪽에서, 때로는 오른쪽에서 중앙을 향해 조약돌을 굴린다. 조약돌에 묻은 잉크는 처음에는 진하게, 잉크가 다하면 연한대로, 자신의 표면에 가진 물감의 양만큼, 자신의 궤적대로, 캔버스에 흔적을 남긴다. 작가는 다시 하찮은 막대기를 던지고 조그만 돌멩이를 굴리길 1000번 반복한다. 화면에는 그렇게 우연의 결정을 따라 만들어진 세계가 그려진다. 작가의 의도가 사라진 세계, 잘 그리기 위한 테크닉이 사라진 화면이 만들어진다. 우연이 결정하고 허망한 몸짓이 반복된 결과물이 만들어진다.
전시장에서 만난 최 화백은 “그림이란 게 잘 그리기만 해서 좋은 것일까, 오래전부터 의문을 가졌다”고 말했다.
그의 출발은 유명한 학교를 나오고 그를 유망하게 비추는 상을 받으며 화단에 섰지만, 작가로서 성숙해 갈수록 회의감을 느낀 것처럼 보인다. 그는 이런 허망함에서 비롯된 방식을 택한 계기를 묻는 말에 이렇게 말했다.
“그림들이 너무나 경쟁의 도구가 돼 가고 있다고 느꼈다. 그림을 통해 상을 받고 팔고 이름을 알리려 한다. 그림의 주변에 그런 일이 너무 많다. 그게 그림인가 생각했다.”
붓 대신 도구를 쓰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가능한 한 잘 그리려 노력해서 하는 건 제 그림이 아닐지도 모른다. 붓이란 건 인간이 그림을 가장 잘 그리고 드러내기 위해 만들어낸 도구다. 그 도구를 버리려 했다. 제가 하는 방법은 단순하고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다만 그런 노력을 하느냐 안 하느냐의 차이다.” 잘 그리려는 욕심, 욕망을 배제한다는 설명이다.
박겸숙 미술평론가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들이 만들어내는 울림을 느끼며 그 흔적을 따라”, “나직한 울림이 시작된 곳에서” 탐욕에서 벗어난 작품을 제작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박 평론가는 이번 전시를 계기로 쓴 글에서 “작가 최상철은 ‘그리지 않음으로 그림을 완성한다’. 일종의 역설과도 같은 이 말은 천 번의 궤적이 만들어낸 작품에 대한 가장 완벽한 설명”이라며 “어떠한 인위적인 더함이 없는 ‘있는 그대로의 결과’를 마주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12월11일까지.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