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기억에 남는 탈북민은 어떤 분이었나요”
김재숙 남북하나재단 생활안정부 부장(사진)은 한국전쟁 당시 자유를 위해 국군으로 참전해 싸우다가 북한에서 포로생활을 했던 탈북민을 A씨를 가장 먼저 떠올렸다. 국군포로 출신이었던 만큼 A씨는 북한에서도 삶이 녹록치 않았다. 게다가 전쟁 후유증으로 난청이 생겨 소리를 잘 듣지 못했다.
김 부장은 “이 분은 북한을 탈출해 중국에서 조선족 여성을 만나 가정을 꾸렸던 분”이라며 “막상 A씨는 한국에 들어오는 것을 고민했는데 함께 있던 이 여성분의 설득으로 한국에 들어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A씨의 삶은 한국에서도 녹록치 않았다. 일흔이 다 된 나이에 한국에 들어온데다가 거동마저 편하지 않았다. 그의 곁에서 아내가 경제활동을 하며 생계를 꾸려나갔다. 그 와중에 생사를 알 수 없었던 형이 일본에 거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됐다.
A씨는 형을 만나기 위해 곧바로 일본으로 출국했다고 한다. 하지만 A씨는 형을 만날 수 없었다. 일본 공항에서 형의 아내로부터 “만나지 않겠다”는 형의 의사를 전달받았기 때문이다. 결국 A씨는 울면서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15년전 이야기지만 김 부장이 유독 기억에 남는 탈북민이었다.
김 부장은 2004년부터 탈북민 지원사업에 연을 맺게 됐다. 출산과 육아로 경력이 단절됐던 김 부장은 제2의 삶을 위해 2004년 사회복지 대학원에 진학했다. 대학원에서 학업을 이어가면서 부산 사회단체에서 탈북민 지원업무를 시작했다.
김 부장이 본격적으로 지원 사업을 했던 2007~2008년에는 탈북민이 한 해 3000여명이 한국에 들어오는 ‘정점의 시기’였다. 김 부장이 처음 일을 시작했던 부산에도 300여명의 탈북민이 거주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탈북민이 수도권에 거주하는 점을 미뤄보면 이례적인 일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탈북민에 대한 지원도 지금보다 부족했고, 탈북민에 대한 편견도 더 강했다고 회상했다.
김 부장은 “지금과 달리 당시 탈북민에 대한 이미지는 알려진 것이 없었다”며 “그 때 지인들도 탈북민에 대한 경계심이 많아는데 무섭지 않냐는 질문도 조심하라는 조언도 들었다”고 말했다.
2000년대 자유를 찾아 한국으로 넘어온 탈북민이 한국 사회에 잘 적응해 국회의원, 연예인, 언론 분야, 유튜버 등 각 분야에 진출하면서 탈북민에 대한 편견이 옅어진게 아닐까 김 부장은 생각했다.
김 부장은 탈북민 지원 사업의 변환점을 맞은 시점이 이명박정부 때 였다고 설명했다. MB정부 당시인 2010년을 기점으로 탈북민 정착지원 센터인 하나센터가 만들어지면서, 인력이 확대돼기 시작했다. 또 통일부가 탈북민에 대한 예산을 편성해 탈북민 정착 사업을 실시하면서 지원 사업의 초석이 됐다고 평했다.
김 부장은 “당시 남북관계는 연평도 포격 사건 등 갈등국면이었지만, 내부적으로는 탈북민 정착 사업이 빛을 보던 시기”라고 했다.
이후 정권이 바뀌면서 탈북민 지원 사업은 소폭 달라져도, 예산 규모의 지원 시스템은 이어져오고 있다. 또한 탈북민을 상대로 하는 대안학교도 인가를 받는 등 더욱 안정됐다고 김 부장은 말했다.
김 부장이 탈북민 지원사업을 하면서 가장 안타까운 계층은 ‘3국 출신 아이들’이라고 했다. 이들은 탈북민이 한국으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중국 등 외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말한다. 이 아이의 국적은 북한이 아닌 출생한 국가가 돼, 북한 이탈주민법을 인정받을 수 없게된다. 법의 테두리 안에 들어오지 못하면 탈북민에 대한 국가적인 정착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김 부장은 탈북민지원사업을 20년 가까이 해오면서 국가의 지원시스템에서 벗어났지만, 확실하게 체감할 수 있는 지원으로 도움을 줄 때 기쁨을 느낀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김 부장은 탈북민에게 바라는 점으로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삶’을 말했다. 우리 주변의 탈북민들은 성공에 대한 목표를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지만, 앞만보고 달리다보면 건강을 잃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김 부장은 이들에게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자신을 돌보면서 스스로 사랑해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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