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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란의얇은소설] 삶이 우릴 때려눕힌다고 느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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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04-14 23:08:55 수정 : 2023-04-14 23: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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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한순간 나락으로 떨어진 기분
있는 힘 모아 땅 밀고 일어서야 희망

제임스 설터 「20분」(‘아메리칸 급행열차’에 수록, 서창렬 옮김, 마음산책)

새 단편소설을 쓰기 전에는 매번 머릿속이 하얘지곤 한다. 새로운 이야기 앞에서는 앞의 방식과 경험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구성은 어떻게 할지, 어떤 목소리로 독자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게 효과적일지에 대해 고민해야 하니까. 조금 과장을 하자면 그야말로 소설 쓰기의 처음으로 돌아가는 기분이다. 그럴 때 ‘작가의 작가’라는 칭호를 듣는 제임스 설터가 미국 문예지 <파리리뷰>와의 인터뷰에서 단편소설에 관해 한 말을 읽고 또 읽는다. ‘우리가 지금 문학의 모닥불 주위에 앉아 있다고 가정해 보자, 어둠 속에서 여러 목소리가 들려오는데 어떤 목소리를 들으면 졸리고 어떤 목소리들에는 귀를 쫑긋 세우고 귀 기울이게 된다. 그처럼 단편은 흡인력이 있어야 하며 첫 줄, 첫 문단 모두 독자를 끌어들여야 하고 소설이 끝날 때는 의미도 있고 기억할 만한 것이어야 한다’는 조언을.

조경란 소설가

그가 자신의 단편 중에서 좋아한다고 꼽은 「아메리칸 급행열차」와 「탕헤르 해변에서」의 첫 문장은 각각 이렇다. “이제는 그 모든 장소와 모든 밤을 생각하는 것이 쉽지 않다.” “바르셀로나, 새벽. 호텔은 어둡다. 큰길은 죄다 바다를 향하고 있다.” 그리고 「20분」의 첫 문장은 “이 일은 카본데일 근처에서 제인 베어라는 여자에게 일어났다”이다. 우리가 지금 문학의 모닥불 주위에 앉아 있다고 가정해 보면 제인 베어라는 여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그 모든 장소에서 인물들이 무엇을 보고 경험했을까? 궁금해하며 다음 문장을 기다리지 않을까. 제임스 설터는 상상이나 전적으로 꾸며내서 쓰는 소설에 관심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듣고 알고 있는 이야기를 “완벽하게 알고 자세히 관찰”했다고 느낄 때까지 기다렸다 소설을 쓰는 타입에 가깝다. 독자에게 그것이 ‘본질적으로 진실한 이야기’로 받아들여지길 바라며.

“나는 언젠가 한 파티에서 그녀를 만났다”로 이어지는 단편 「20분」은 그 파티에서 만난 그녀가 나에게 자신의 인생에서 벌어진 20분, 죽음을 기다리고 있어야 했던 그 운명의 시간에 대해 들려주는 이야기다.

일과가 끝난 늦은 오후, 이미 어두워지는 무렵에 제인 베어는 말을 타고 혼자 산등성이에 올랐다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리 영리하지도 않고 걸을 때 가끔 비틀거리는 말에게도 그 길은 익숙했다. 그녀와 말은 배수로를 따라 문을 향해 나갔고 그들은 언제나 그 문을 뛰어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갑자기 말이 뭔가를 포기하고 멈췄다. 순식간에 그녀는 말의 머리 위로 튕겨 나갔다. 땅바닥에 떨어진 그녀의 무릎으로 슬로모션처럼 말이 곤두박질쳤다. 그녀의 몸은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지만 정신은 알고 있었다. 20분. 사람들이 늘 그렇게 말한 시간. 20분 안에 구조되지 못하면 살아날 가능성이 없을 거였다. 이웃들의 집은 멀었고 도로를 오가는 불빛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 곁에서 풀을 뜯고 있는 말은 안장을 차고 있으므로 누군가 말을 본다면 그녀를 구조하러 올 텐데.

도와주세요! 소리를 지르고 기도를 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손쉽게 할 수 있었던 일들과 하고자 했던 수없이 많은 일이 떠올랐다. 지금 이렇게 자신이 땅바닥에 팽개쳐질 거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순간들. 이제 그녀는 아버지를 떠올린다. 인생을 한 문장으로 설명할 줄 알았던 아버지. “삶은 우릴 때려눕히고 우린 다시 일어나는 거야. 그게 전부야.” 그녀는 손바닥으로 땅을 밀기 시작했다. 『아메리칸 급행열차』의 서문을 쓴 편집자는 이 단편에 대해 20분 안에 한 사람의 전 인생을 드러내기 때문에 좋아한다는, 매번 이 단편으로 돌아가곤 한다는 찬사를 덧붙였다.

어느 한순간, 땅바닥에 내팽개쳐진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렇게 삶이 나를 때려눕히려고 할 때. 천천히, 있는 힘을 끌어모아 손바닥으로 땅을 밀어본다. 안전한 방향 쪽으로. 신이 있고 세상엔 어떤 미덕이 아직 남아 있다고 믿는 게 그때는 진짜 도움이 될지 모른다.


조경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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