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일이 신분·병력 확인으로 업무과중
병·의원 “상담사 둬야하나” 볼멘소리
플랫폼업계 “초·재진은 중요 요소 아냐”
참여 의사 “행정 일까지 모두 떠안아”
의료계·정부, ‘보조적 수단’ 이란 점 강조
시범 사업, 비대면 진료 효과 검증 과정
초기부터 의료계 ·플랫폼 업계 갈등 고조
정부, 3개월 계도기간 거쳐 제도화 마련
지난 1일부터 시작된 비대면 진료 시범사업이 시행 초기부터 삐걱거리고 있다. 시행 10일이 지났지만 의사들의 참여가 저조한 데다 시범사업 실시에 따른 시행착오 등으로 의료 현장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초·재진 구분 없이 비대면 진료가 가능했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와 달리 예외적으로 초진을 허용해서다. 환자를 구분하기 번거롭고 확인할 책임이 주로 의료진에게 있는 탓에 비대면 진료를 중단하는 의료기관도 속출하고 있다.
전북 전주시의 한 소아청소년과 전문의는 “시범사업을 의사와 환자 모두 모르는 경우가 많고 책임 소재가 애매해 비대면 진료를 안 받는 경우가 많다”며 “초진은 ‘예외적’으로 가능하기 때문에 유입되는 환자도 거의 없고 서류를 확인할 방법도 마땅치 않다”고 하소연했다.
플랫폼 업체와 이를 이용하는 비대면 진료 의료기관은 초진과 재진이 환자 진료에서 중요한 요소가 아닌 데다 재진 기준도 모호해서 시범사업 실효성이 부족하다고 주장한다. 의료계는 의료접근성이 높은 우리나라는 위험성이 잠재하는 비대면 진료 대상을 확대할 이유가 없다고 맞선다. 정부는 시범사업을 주기적으로 평가해 개선해 나갈 방침이다. 의료계와 플랫폼 업계 간 고조되는 갈등을 중재해야 하는 과제도 맡게 됐다.
11일 비대면 진료 애플리케이션(앱) 닥터나우에 따르면 시범사업 시작 이후 일주일(1~7일) 동안 의료진의 진료 취소율은 40%에 달했다. 지난달 평균 17%에서 두 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일평균 진료 요청 건수는 4700건으로 지난달(5000건)과 큰 차이가 없었으나 취소율만 크게 늘었다. 진료 직전 이용자가 문진표를 작성하게 돼 있는데 그 단계에서 취소 통보를 받는 비율이 폭증했다는 의미다. 전신영 닥터나우 이사는 세계일보와 통화에서 “취소 사유 대부분이 시범사업 대상을 확인하지 못해서인 것으로 나타났다”며 “신분 확인 등 업무 과중으로 진료 자체를 거부하는 경향도 있다”고 밝혔다.
실제 의료 현장에서는 초·재진 여부를 확인하느라 정작 의료에 집중하지 못한다는 볼멘소리가 많았다. 만성질환자의 경우 1년 이내, 그 외 환자는 30일 이내 같은 의료기관에서 동일한 질환으로 추가 진료를 받을 경우에만 비대면 진료가 가능하다. 재진 환자와 더불어 예외적으로 초진이 허용되는 섬·벽지 거주자와 거동불편자, 감염병 확진자 등을 의료기관이 일일이 확인해야 한다.
서울의 한 산부인과 전문의는 인터뷰에서 “차라리 상담사를 따로 두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며 “이전과 같은 질병인지 아닌지에만 집중하게 되는데 이게 환자를 위한 진료인지 의사의 책임을 줄이는 과정인지 모호하다”고 말했다. 인천의 한 이비인후과 전문의도 “기존에는 플랫폼이 진료 이외의 행정적인 과정을 해결해 줬는데 시범사업은 모든 걸 의사의 책임으로 돌렸다”고 주장했다.
초·재진이 진료의 중요한 기준이 아닌데도 비대면 진료 대상을 가르는 기준으로 사용되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목소리도 높다. 이달부터 비대면 진료를 중단한 충남 천안시의 한 가정의학과 전문의 A씨는 “만성질환을 제외하면 초·재진 여부는 대부분의 진료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며 “재진이 되면 진찰비가 줄어들면서 수가가 소폭 줄어들 뿐인데 비대면 진료 시범사업은 오히려 여기에 수가를 추가로 지원한다고 하니 의사 입장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부산의 한 내과 전문의는 “병이 낫지 않고 30일 안에 여러 번 오는 환자를 비대면 진료로 보는 건 말이 안 된다”며 “초진을 비대면으로 받더라도 병이 호전되지 않으면 내원해 검사를 받는 게 맞다”고 했다. 해외 각국도 진료나 약 처방 일수를 제한해 비대면 진료 후 대면 진료를 의무로 받도록 유도한다.
재진 환자가 많은 일부 병원에만 비대면 진료가 몰릴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A씨는 “평소에도 환자가 줄을 서는 몇몇 병원을 제외하면 재진 환자가 많은 경우는 거의 없다”며 “진료를 많이 보는 곳이 비대면 진료를 요구할 수 있으니 ‘잘되는 곳만 잘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다만 정부는 비대면 진료 전담 의료기관을 방지하기 위해 비대면 진료·조제 건수를 월 전체 건수의 30% 이하로 제한했다.
만 18세 미만 소아·청소년이 공휴일과 야간에 비대면 초진을 받는 경우 처방 제외, 의학적 상담만 받을 수 있는 것에 대해서도 실효성이 없을 것이란 의견도 있다. 아이를 데리고 응급실을 갈지 고민하는 부모에게 처방 없는 상담이 대안이 되기 어렵단 것이다. A씨는 “아이의 열을 낮출 약을 받고 다음 날 병원에 찾아가려는 부모들이 많았다”며 “응급실에 가도 경증 질환은 몇 시간 동안 대기하다가 의사에게 짧게 확인받고 약을 타는 것이 전부”라고 했다.
◆“부족한 논의 과정이 혼란 키워”
의료계와 정부는 비대면 진료는 ‘보조적 수단’이란 점을 강조하고 있다. 손으로 만지는 촉진(觸診), 몸을 두드려 반응을 보는 타진(打診), 소리를 듣는 청진(聽診) 등이 없이 제한된 진찰을 하는 비대면 진료의 경우 오진의 위험성은 항상 상존한다. 특히 시범사업은 코로나19의 감염병 단계가 하향하고 비대면 진료가 불법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한 임시조치이기 때문에 확대 시행하기보다는 제도화되기 전 비대면 진료의 효과를 검증하는 과정으로 봐야 한다고 설명한다.
코로나19 당시 비대면 진료를 했던 경기의 한 내과 전문의는 세계일보와 통화에서 “고령자의 경우 의사소통이 어려워 환자를 파악하는 데 답답한 면이 많았다”며 “대면 진료를 해도 놓치는 경우가 있는데 의료 접근성이 낮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비대면 진료를 확대하는 건 찬성하지 않는다”고 했다.
임현택 대한소아청소년학과의사회 회장은 “코로나 상황이 거의 마무리되고 진료도 정상으로 돌아가는 게 세계적 추세”라며 “비대면 진료는 오진할 가능성이 늘 도사리고 있고, 의사의 오진은 애들의 생명과 직결된다”고 지적했다.
정부는 3개월간의 계도기간을 거쳐 현장 의견을 듣고 제도화 방안을 마련할 방침인데 시범사업 초기부터 의료계와 플랫폼 업계 갈등도 고조되는 실정이다. 플랫폼 업계가 현장 혼란을 이유로 비대면 초진 확대를 요구하자 의사·병원·약사단체는 반박자료를 잇달아 내며 “불안감을 조장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장지호 원격의료산업협의회(원산협) 회장은 “단 한 번의 논의 테이블도 마련되지 못한 채 시범사업이 시작되면서 빚어진 일”이라고 주장했다.
대한내과의사회는 지난 9일 비대면 진료 취소율에 대해 “의료 접근성이 좋은 우리나라에서 대면 진료와 비교해 비대면 진료의 절차가 복잡하고 불충분하다고 판단되는 인식 등 여러 요인을 감안한 국민들의 합리적 선택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내과의사회는 “(비대면 진료는) 꼭 필요한 환자에게 제한적으로 대면 진료의 보완적인 수단으로 시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