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대표적인 약술이라고 한다면 인삼주를 들 수 있다. 소주에 인삼을 침출, 그 약용 기능이 술에 들어가게 하기 위함이다. 실제로 인삼과 술을 같이 섭취하면 인삼의 약용 효과가 일어난다. 게다가 알코올은 몸에 흡수가 빠른 만큼, 효과도 크게 느껴진다.
약술 문화가 우리에게만 있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서양에서도 이미 그리스 신화나 로마 시대에 약술이 존재했다. 그중 가장 상품화가 많이 된 술을 이야기하자면 바로 ‘진(Gin)’이다.
진은 1660년 네덜란드의 의학 교수인 실비우스가 만들어졌다고 이야기하지만, 기원을 따진다면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존재했었다. 의사이자 주류 작가인 캠퍼 잉글리시에 따르면 역사상 약이 등장할 때마다 주니퍼 베리(노간주나무 열매)가 등장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그 역사로는 기원전 1550년 이집트 파피루스에 황달에 효과가 있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으며, 또 중세 시대 흑사병이 유행했을 때 의사의 마스크에 주니퍼 베리를 넣어 다니기도 했다. 초기 진은 맥주에 넣어 마셨으며, 근대에 들어와서 증류주에 주니퍼 베리를 넣고 재증류, 그 향미를 즐기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영국의 명예혁명 덕분에 네덜란드의 진은 영국으로 가게 된다는 점이다. 명예혁명은 유혈 사태가 없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 당시 의회와 대립하던 제임스 2세가 프랑스에 망명을 가고, 뒤를 이어 네덜란드 귀족인 윌리엄 3세가 영국 국왕이 된다. 이 윌리엄 3세는 이전 왕 제임스 2세가 프랑스로 망명을 가다 보니 프랑스 코냑(브랜디)을 싫어했다. 그래서 프랑스산 코냑 수입에 제한을 걸었다.
새로운 술에 대한 수요가 영국 내에서 들끓었고 네덜란드의 진은 자연스럽게 영국으로 강제 진출을 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것이 바로 ‘런던 드라이 진’. 현재 이 런던 드라이 진은 1ℓ당 당류를 0.1g 미만으로 넣어야 하기에 ‘드라이’란 이름이 붙게 됐다. 영화 ‘007’ 시리즈에 등장하는 ‘마티니’나 ‘진토닉’ 등이 대표적인 진으로 만든 칵테일이다. 18세기 진은 영국에서 엄청나게 유행한다. 면허 없이 만들 수 있었고, 그래서 조악한 제품이 많았다. 증류소가 수백 개 생겨났으며, 가격 경쟁을 하다 보니 가격도 계속 내려갔다.
하지만 다양한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고, 결국 영국 정부는 진에 붙는 주세를 높인다. 소매상에 붙이는 세금을 4배나 올리려고 했고, 이에 국민 입장에서는 줬다가 뺐냐는 이미지가 팽배했다. 이것 때문에 또 폭동이 일어나고 사회적으로 계속 불안정했다.
결국 세금은 다시 내리지만, 허가받은 곳에서만 팔 수 있게 했다. 예전에는 단맛으로 맛을 많이 가렸는데, 나중에는 기술도 좋아져서 단맛이 적고 풍미가 좋은 런던 드라이 진이란 것도 나올 수 있게 됐다. 그래서 이 공법으로 만들면 서울에서 만들어도 런던 드라이 진, 파리에서 만들어도 런던 드라이 진이 되는 것이다. 즉 ‘런던에서 만들었다’가 아닌 ‘런던 드라이 진 방식’으로 술을 빚으면 런던 드라이 진이 된다.
최근 한국의 주류 시장을 보면 진 시장이 확장돼 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숙성이 필요한 위스키와 달리 진은 증류 후 바로 상품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많은 위스키 증류소에서 운영 자금을 진을 제조 및 판매해서 조달하곤 한다. 흥미로운 것은 한국의 전통 소주에 주니퍼 베리를 비롯한 우리 농산물로 만들었다는 것. 멋진 코리아 드라이 진이 등장하고 있는 셈이다.
● 명욱 주류문화 칼럼니스트는…
주류 인문학 및 트렌드 연구가. 숙명여대 미식문화 최고위과정 주임교수를 거쳐 현재는 세종사이버대학교 바리스타&소믈리에학과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넷플릭스 백종원의 백스피릿에 공식자문역할도 맡았으며, 저서로는 ‘젊은 베르테르의 술품’과 ‘말술남녀’가 있다. 최근에는 술을 통해 역사와 트렌드를 바라보는 ‘술기로운 세계사’를 출간했다.
명욱 주류문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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