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이하 현지시간) 라오스 수도 비엔티안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이시바 시게루 신임 일본 총리 간 정상회담이 열렸다. 이번 회담은 라오스에서 개최된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 정상회의에 양국 정상이 참석한 계기로 이루어졌으며, 이시바 총리는 취임 9일 만에 윤 대통령과 만났다.
이시바 총리는 이 자리에서 ‘지역의 안정과 평화’를 강조했고, 윤 대통령은 한·일 정상이 ‘셔틀 외교’를 활용해 양국 관계를 지속해서 발전시켜 나가자고 제안했다. 윤 대통령은 특히 “2025년은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맞이하는 해로, 양국 관계의 희망찬 미래상을 제시하고 양국 국민이 도약을 체감할 수 있도록 긴밀하게 협력해 나갔으면 한다”고도 밝혔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이시바 총리가 줄곧 주장해온 ‘아시아판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는 거론되지 않았다. 아세안 국가들과 중국이 반대하는 의제를 양국의 첫 정상회담에서 다루기 부담스러웠을 터다. 그동안 이시바 총리는 공개적으로 여러 차례 집단안보체제인 아시아판 나토 구상을 밝혀왔다. 하지만 현재로써는 이 구상이 실현될 가능성이 높지 않다. 당장 이번 아세안 회의에서도 공식 논의되지 못했다.
이시바 총리는 ‘안보 오타쿠’라 자칭할 정도로 집단안보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는데, 지난달 27일 미국의 싱크탱크인 허드슨 연구소에 기고한 글에서 “아시아의 집단 방위 시스템 부재로 상호 방위의무의 공백이 전쟁 발생 가능성을 높인다”고 강조하는 한편 “중국에 대한 억제 노력이 필요하고, 최근 우크라이나와 가자 지구의 사례처럼 중국의 위협과 대만에 대한 침공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했다.
이에 대해 중국 국방부의 우첸 대변인은 지난 15일 브리핑에서 "일본이 존재하지도 않는 ‘중국 위협’을 꾸며내는 의도는 일본의 군사적 확장에 대한 국제사회의 주목을 (중국으로) 옮기려는 것”이라며 “중국은 이에 단호히 반대한다”고 밝혔었다.
일본 내부에서도 자칫 이번 구상이 일본의 평화헌법과 더불어 공격을 받을 때만 방위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전수방위 정책을 깨트릴 가능성을 제기하며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시바 총리의 구상이 실현되기 어려운 이유는 나토의 설립 취지와 목적을 살펴봐도 알 수 있다. 나토는 2차 세계대전 후 냉전 시기 중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설립된 협력체로, 기본적으로 ‘군사적 동맹’을 원칙으로 한다. 설립 근간인 북대서양 조약에서도 핵심은 제5조항 ‘집단방위’ 원칙으로, 회원국 중 1곳이 공격받으면 이를 전체 회원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해 공동 대응한다는 규정이다. 아시아판 나토가 설립된다면 아시아에서 어떤 국가를 가상의 적으로 규정할지, 그리고 만약 중국을 적으로 규정한다면 중국과 경제협력을 맺고 있는 역내 국가를 어떻게 참여시킬 수 있을지도 논란이 되는 부분이다.
나토의 기능이 전쟁 대비를 위한 전통적 국토 안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도 경제·정치·군사적으로 갈수록 복잡해지는 아시아에서 집단안보체제의 실현 가능성을 낮추는 요인이다. 나토의 집단방위원칙은 원래 영토에 대한 직접적 공격에만 적용되었으나, 최근 비군사적 강압에 대한 대응도 활발해지고 있다.
2007년 에스토니아가 러시아의 지원을 받은 것으로 의심되는 사이버 공격을 당했을 때 제5조항 적용이 어렵게 되자 나토는 이 사건을 계기로 1년 후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에 나토 사이버방위센터(NATO Cooperative Cyber Defense Centre of Excellence)를 설립했다. 2014년 웨일스 정상회담에서는 사이버 공격에 대한 대응을 나토 조항에 포함시켰다. 전통적인 국가안보 범위를 넘어선 대목이다.
무엇보다 아세안이 거대한 글로벌 마켓으로 떠오르는 시점에 군사동맹 협의체 구상은 애써 구축해온 역내 교역 시스템을 무너트릴 우려도 있다. 아세안은 총인구 6억7000만명(2021년 기준), 경제 규모 3조8100억달러(2023년 국내총생산 기준)에 이르는 거대 시장이다. 지금 성장 속도라면 2030년에는 세계 4위권의 경제 시장이 된다. 특히 한국과 아세안은 1989년 이후 교역은 23배, 투자는 80배, 인적 교류는 37배 이상 늘었다.
윤 대통령은 지난 10일 라오스 국립컨벤션센터(NCC)에서 열린 한·아세안 정상회의에서 한·아세안 관계를 2004년 맺은 ‘포괄적 협력 동반자 관계’에서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로 격상하기로 아세안 정상들과 합의했다. 이로써 아세안 국가는 역내 가장 중요한 경제·문화·안보 파트너로 발돋움했다.
이러한 시기 아시아를 긴장 관계로 몰아넣을 수 있는 아시아판 나토 구상은 득보다 실이 많다. 따라서 우리 정부는 신중한 입장이다. 조태열 외교부 장관은 이시바 총리의 구상에 대해 “구체화하면 협의할 사안”이라며 “앞으로 중장기적으로 인도태평양 지역 구도가 어떻게 갈 것인지 염두에 두고 고민하겠다”고 원론적인 입장만 밝힌 바 있다.
미국과 인도 역시 아시아-태평양 안보 시스템에 대한 접근 방식이 다르다는 이유로 부정적이다.
이시바 총리는 아시아판 나토에서 미국의 핵무기 공동 활용 가능성을 언급했는데, 이는 비핵화를 추구하는 최근 국제사회의 흐름과 상반되는 점에서 논란을 일으켰었다.
아세안 정상회담을 계기로 다시 수면 위로 오른 아시아판 나토가 당장 실현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향후 한일 관계를 비롯해 아시아 전역에 대한 경제·문화협력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치는 주제인 만큼 우리 정부는 체계적이고 단계적으로 대응할 필요성이 있다.
강정민 UN SDGs 협회 연구원 unsdg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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