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기의 아픔이 깃든 대관령 마루에 올라 상념에 잠긴 김선우 시인. 대학시절 ’혁명’을 꿈꾸다가 졸업 후 좌절의 늪에 빠졌을 때 그는 이곳에 와서 지나온 삶을 뒤돌아보고 시 쓰기에 남은 생을 걸었다. |
“폭설주의보 내린 정초에/ 대관령 옛길을 오른다/ 기억의 단층들이 피워올리는/ 각양각색의 얼음꽃// 소나무 가지에서 꽃숭어리 뭉텅 베어/ 입 속에 털어넣는다, 화주火酒― / 싸하게 김이 오르고/ 허파꽈리 익어가는지 숨 멎는다 천천히/ 뜨거워지는 목구멍 위장 쓸개/ 십이지장에 고여 있던 눈물이 울컹 올라온다/ 지독히 뜨거워진다는 건/ 빙점에 도달하고 있다는 것/ 붉게 언 산수유 열매 하나/ 발등에 툭, 떨어진다”(‘대관령 옛길’)
대학시절 김선우는 시와 가깝다기보다는 ‘혁명’을 꿈꾸는 피가 뜨거운 청년이었다. 80년대 말에서 동구권이 무너지는 90년대 초에 걸쳐 대학을 다녔으니, 이상적인 세상에 대한 꿈과 섣부른 좌절을 동시에 어쩔 수 없이 경험해야 했던 세대인 셈이다. 그가 대학을 졸업할 시점인 1992년은 ‘혁명’의 관점에서만 보자면 암담하기 짝이 없는, 같이 꿈을 꾸었던 이들도 뿔뿔이 흩어져 ‘변절’하는 세상이었다. 대학 졸업 후 1년 동안 그는 더 이상 갈 데가 없을 정도로 “막 살았다”고 했다. 그 참혹한 젊은 생의 바닥에서 그를 끌어올려준 게 바로 시였다. 죽음의 충동에서 구해준 것도 그 시여서, 다시 그를 살게 한 시에 그는 미친 듯이 매달렸다. 결국 1996년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대관령 옛길’을 포함한 시들을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그러니 그 대관령은 그네 생의 한 구비를 넘어가는 명실상부한 고갯마루였다.
◇김선우 시인이 고향 바다를 거닐고 있다. 이곳 강릉 안목 해변은 시인이 유년기에 부모와 가끔 소풍 나왔던 곳으로 그때 우주의 에너지와 합일되던 짜릿한 쾌감과 평화를 그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했다. |
혁명을 꿈꾸었던 이들의 좌절과 회한은 사실 오래된 레퍼토리다. 하지만 세월이 가도 청춘의 심장을 그 시절 용광로에 담갔던 이들의 가슴 한구석은 작은 불쏘시개만 던져도 쉬 뜨거워진다. 마지막 행에서 시인이 “너도 갈 거니?”라고 속삭이듯 물었을 때, 처음에는 이별한 연인의 서러운 속울음인 줄 알았다. 김선우와 함께 대관령을 오르며 이 시의 배경을 듣고 나서야 이 말이 청춘을 떠나는 뜨거운 별사였음을 알았던 것인데, 사실 연인의 울음으로 읽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2000년에 나온 그의 첫 시집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에 나오는 시편들은 혁명보다는 연애와 사랑 쪽에, 자연과 모성이 결합된 건강한 여성성의 이미지에 더 가까운 시들이었다.
대관령을 넘어 속초로 올라가 대포항에서 머물다가 이튿날 시인의 고향 강릉을 들러 서울로 돌아오는 여정 내내, 김선우는 명랑하고 맑았다. 그러고 보니 그의 시들도 어두워 침잠하는 것들보다는 아프지만 따스하고, 기울어져도 조화를 찾아가는 긍정의 시편들이 더 많았던 것 같다. 그네는 대관령으로 가는 차 안에서 얼핏 가족사에 대해 말했는데, 11살 많은 그의 둘째 언니가 비구니로 출가해 청도 운문사에서 수행 중이고, 큰오빠가 중학생 때 사고로 죽는 바람에 부모가 생산을 중단한 지 9년 만에 다시 아들을 바라고 낳은 게 남자 이름으로 지어놓은 딸 선우였다. 오빠가 아니었으면 태어나지 못할 운명인 데다, 어느 관상쟁이는 형제들 중 누군가는 산에 들어갈 팔자라고 했다니 죽은 오빠와 산에 들어간 누이를 대신하여 천상 속계에서 용맹정진할 수밖에 없는 숙명을 타고난 모양이다.
“몸져누운 어머니의 예순여섯 생신날/ 고향에 가 소변을 받아드리다 보았네/ 한때 무성한 숲이었을 음부/ 더운 이슬 고인 밤 풀여치들의/ 사랑이 농익어 달 부풀던 그곳에/ 황토먼지 날리는 된비알이 있었네/ 비탈진 밭에서 젊음을 혹사시킨/ 산간 마을 여인의 성기는 비탈을 닮아간다는,/ 세간속설이 내 마음에 천둥 소낙비 뿌려/ 어머니 몸을 닦아드리다 온통 내가 젖는데/ 겅성드뭇한 산비알/ 열매가 꽃으로 씨앗으로 흙으로/ 되돌아가는 소슬한 평화를 보았네/ 부끄러워 무릎을 끙, 세우는/ 어머니의 비알밭은 어린 여자 아이의/ 밋밋하고 앳된 잠지를 닮아 있었네/ 돌아갈 채비를 끝내고 있었네”(‘내력’ 전문)
‘아픈 엄마의 몸을 속속들이 만지고 보살피며 가엾어 하는’ 딸의 독백이 그대로 한 편의 시가 되었다. 여성의 신체 기관이 구체적인 이름으로 직접 등장해도 전혀 외설스럽지 않다. 김선우의 이러한 시쓰기 전략은 “옛 애인이 한밤 전화를 걸어 왔습니다/ 자위를 해본 적 있느냐/ 나는 가끔 한다고 그랬습니다/ 누구를 생각하며 하느냐/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랬습니다”로 시작해 “얼레지의 꽃말은 바람난 여인이래/ 바람이 꽃대를 흔드는 줄 아니?/ 대궁 속의 격정이 바람을 만들어”로 이어지는 ‘얼레지’에서도 구사된다.
“아욱을 치대어 빨다가 문득 내가 묻는다/ 몸속에 이토록 챙챙한 거품의 씨앗을 가진/ 시푸른 아욱의 육즙 때문에// ―엄마, 오르가슴 느껴본 적 있어?/ ―오, 가슴이 뭐냐?/ 아욱을 빨다가 내 가슴이 활짝 벌어진다/ 언제부터 아욱을 씨 뿌려 길러 먹기 시작했는지 알 수 없지만/ ―으응, 그거! 그, 오, 가슴!/ 자글자글한 늙은 여자 아욱꽃핀 스민 연분홍으로 웃으시고”(‘아욱국’ 부분)
광장보다는 밀실에서 소곤거리는 단어들을 자연을 닮은 보편적인 풍경으로, 건강한 일상으로 흡수해내는 능력이 뛰어나다. 그네는 이러한 시들과 관련해 “나는 시인이 되려고 제도권에서 공부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시적 전략이나 담론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며 “어떻게 시를 써야 이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는지 고민하는 많은 시인들과 출발부터 달라서 90년대 유행했던 몸에 관한 담론이나 페미니스트들의 몸 해방론과도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 오히려 담론이나 유행보다는 유소년기를 보낸 산천에서 얻은 힘이 그러한 시의 원동력일 것이라고 스스로 분석했다.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까지 내 놀이터는 뒷산이었어요. 동굴을 드나들기도 하고 버섯도 캐면서 홀로 그 산을 맨발로 누볐습니다. 나중에는 엄마 아빠가 부부싸움을 한 후 화해의식으로 이곳 바닷가로 우리 형제들을 데리고 나들이를 나오곤 했는데, 내 안의 에너지와 바닷가 우주의 에너지가 합쳐져 폭포처럼 쏟아지던 평화와 쾌감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할머니는 설거지한 물도 한꺼번에 휙 버리지 않고 미물들이 다치지 않도록 조금씩 나누어서 버렸어요. 이런 환경에서 자랐으니까 생태적 감수성이라는 게 학습 이전에 체득된 거라고 봐요.”
이 말을 들은 곳은 이튿날 정오 무렵 강릉 안목 해변 찻집의 3층 창가였는데, 전날과는 다르게 햇빛이 청명하게 푸른 동해에 내리꽂히고 하얀 백사장이 경포 쪽을 향해 길게 달려가는 풍경이 넓은 통유리창 아래로 환히 내려다보였다. 시인은 이 평화로운 모태를 떠나 그동안 도시를 떠돌았다. 서울에서도 살았고 문막 원주 용인 춘천 등지로 옮겨 다녔다. 2003년에는 문막의 전셋집을 뺀 돈으로 1년 반 동안 세계 도처를 유랑하기도 했다. 첫 시집이 각별한 주목을 받으면서 화제의 시인으로 떠올랐고, 동지라고 여겼던 페미니스트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고 남성들로부터는 지나치게 페미니즘적이라는 이유로 배척당하기도 했다. 두 번째 시집 ‘도화 아래 잠들다’에서는 “동쪽 바다 가는 길 도화 만발했길래 과수원에 들어 색(色)을 탐했네/ 온 마음 모아 색을 쓰는 도화 어여쁘니 요절을 꿈꾸던 내 청춘이 갔음을 아네”라고 아예 노골적으로 ‘색’을 탐했는데도, 이때부터는 오히려 이런저런 비판들이 모두 가라앉았다. 비로소 그네의 맑은 진정성과 자연을 닮은 건강한 여성성이 그들과 소통을 이루어낸 것이었을까.
그네는 운문사에 기거하는 둘째 손윗누이 영덕스님이 다리를 놓아 여러 사찰의 스님들과 연을 맺어서, 해인사는 친정집처럼 편하고 오히려 누이가 있는 운문사는 시댁처럼 조심스럽다고 웃으며 말했다. 운문사의 학장스님은 첫 시집을 바치자 금반지 하나를 내주며 “언제 절에 들어올 거냐?”고 진지하게 물었고 누이도 잊을 만하면 가끔 “빨리 들어오라”고 한다는데, 그네는 속가에서 사는 게 아직은 더 만족스러운 듯하다. 우리네 세는 나이로 불혹에 이르렀으니 아직 푸릇한 외모와는 달리 그네도 이제 중년에 접어드는 건 부인할 수 없지만 사는 건 여전히 청춘이다. 예전에 비해 많이 유연해지긴 했어도 여전히 결혼은 생각이 없고 “가장 자유로운 상태에서 사랑하며 사는 것”이 최선이라고 했다. 아무려면 어떤가, ‘직립의 슬픔’만으로도 버거운 한 생인 것을.
“이상하다 이 길은/ 어느 곳에서 바라봐도 구부러져 있다/ 길을 따라 내 몸도 구부러져/ 두 다리에서 네 발로/ 온몸으로 길 위에 눕게 되었는데/ 아름다운 비늘, 날랜 짐승 하나가/ 내 허리를 감치며 수풀로 사라지고// 꿈이었을까/ 직립하던 슬픔은// 스물아홉에 출가한 불혹의 누이가/ 내 전신을 스치며/ 동안거 든다”(‘도솔암 가는 길’)
조용호 선임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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