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하 150여개·다리 400여개, 작은 섬 117개 연결 '물의 도시'
영화에서 보았던 베네치아로 떠나면서는 로맨틱한 풍경과 고요의 열락 속으로 빠져들 준비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른한 몸을 곤돌라에 슬쩍 얹고 운하를 따라 유유히 바다로 흘러드는 꿈을 꾸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꿈결처럼 찾아간 베네치아에선 누구나 한순간에 사랑에 빠지고 만다. 야간열차를 타고 베네치아에 도착한 아침, 꿈꾸던 베네치아는 없었다. 수많은 관광객이 시끌벅적하게 돌아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수선한 풍경과 소음이, 모른 척하려던 피로까지 끄집어 당겼다. 그러나 다행이었다. 그 생각이 길게 가진 않았다. 베네치아의 첫 번째 골목에 들어섰을 땐 온 세상이 고요해진 듯했고, 두 번째 골목에 들어섰을 땐 적막함에 가슴이 울컥했기 때문이다. 골목 끝에서 키스하는 연인들을 보는 순간엔, 베네치아에 빠져들었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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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알토 다리에 서서 바라보는 베네치아는 북적이기도 하고 평화롭기도 하다. 우아한 고요 속에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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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수로를 부드럽게 흘러다니는 곤돌라는 베네치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물건이다. 곤돌라가 없었더라면 베네치아 풍경은 조금쯤 심심했을 것이다. |
골목 안쪽엔 오래된 저택을 개조한 아름다운 숙소들이 많다. 지친 몸을 침대에 길게 늘어뜨리다가 거실에서 차 한잔 마시고 일광욕을 즐기기에 좋은. 베네치아에서의 첫날, 나는 바깥 구경은 다음날로 미루었다. 몸을 길에 늘어뜨리는 데에 하루를 온전히 보내는 휴식, 베네치아는 그런 여유가 어울리는 곳이니까. 먹을 것을 사러 나간 길, 베네치아에선 전혀 볼 수 없다던 바퀴 달린 물건을 보았다. 늙은 남편이 늙은 아내를 태워 밀고 가는 휠체어. 노부부는 오랜만에 외출하는지 곱게 차려입고 나서는 길이었다. 그들은 지나가는 친구를 만나 한참 동안 이야기했다. 아직 안 죽고 살아 있어 또 만나나 보다고, 우리 다음에 또 만날 수 있겠느냐고, 그런 말이었을까. 손을 붙잡더니 좀처럼 떨어지지 못하는 두 할머니는 눈가를 훔쳤다. 부부는 다시 또 몇 걸음 걷다가 한 사내와 이야기했다. 마치 어딜 가기로 한 것을 잊은 사람들처럼, 아니면 마지막 인사를 나누기 위해 마지막 외출을 나온 이들처럼. 베네치아의 바퀴는 사람의 걸음보다도, 그 어떤 생애보다도 느렸다. 그래서 아름다웠다.
다음날 오후엔, 베네치아에서 버스 역할을 하는 배인 바포레또를 타고 십분쯤 걸려 무라노섬으로 갔다. 베네치안 글라스의 본산지인 그곳에선 유리세공품들이 햇살과 함께 반짝였다. 사람들은 그 햇살 아래 누워 일광욕을 즐기며 와인을 마셨다. 나도 다리 위에서 두 발을 바다로 늘어뜨린 채 와인이 스며든 달콤한 낮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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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칼레 궁전에 기대어 서서 아드리아해를 바라보면 저 멀리 마조레 성당이 보이고 발 앞에선 정박한 곤돌라들이 파도에 넘실거린다. |
내가 나를 못 알아보면 어쩌지?
골목에서 곧잘 마주치게 되는 건 다리 밑을 지나가는 검고 우아한 곤돌라와 길모퉁이의 화려한 가면 가게다. 문득 걸음을 멈춰 가면 가게의 쇼윈도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떤 얼굴이 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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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퀴가 없는 도시 베네치아에서 만난 유일한 바퀴는 노부부의 휠체어였다. 느릿한 바퀴의 산책과 아름답고 오래된 사람이 눈물겨웠다. |
가게 벽면엔 그가 손수 만들었다는 가면들이 가득했다. 대부분이 클래식한 가면들이었다. 그는 말없이 종이 반죽을 붙여 가면을 만들고 있었다. 나는 무얼 만드느냐고 물었다.
“풀치넬라, 판탈로네, 콜롬비나, 할러퀸, 아를레키노….”
그가 알 수 없는 이름들을 쏟아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내게 그는 다시 말했다.
“풀치넬라는 매부리코를 가진 시골뜨기 얼간이, 판탈로네는 탐욕스러운 베네치아 상인, 콜롬비나는 명랑하고 영리한 하녀인데 할러퀸과 사랑에 빠졌죠. 할러퀸은 재치 넘치는 하인….”
그는 마치 자신의 친구들을 소개하듯이 일일이 가면들을 설명해주었다. 마치 그가 가면을 쓰고 연기를 하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에게 왜 가면을 만드느냐고 물었다.
“코메디아 델라르테(Commedia Dell’arte)가 좋아요.”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유행했던 코메디아 델라르테는 가면을 쓰고 즉흥 연기를 하는 극. 그가 말한 풀치넬라, 판탈로네 같은 이들이 바로 그 극에 나오는 인물들이었다. 그는 내게 가면을 하나 선물로 주었다. 그가 나를 위해 골라준 가면은 무레따(Mureta).
“무레따는 여자들의 가면이죠. 여자들이 외출할 때 거리의 남자들이 얼굴을 못 보게 하기 위해 쓰는 거예요. 그리고 가면에 달린 끈을 입에 물어 말을 못 하게 했죠. 여행하는 동안 이 가면을 쓰면 위험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풀치넬라처럼 내게 손을 흔들었다. 나도 무레따처럼 말없이 손을 흔들었다.
베네치아에서의 마지막 밤, 물 위에 비친 내 얼굴을 보다가 문득 의문이 들었다. 어느 날 문득 내가 나를 못 알아보면 어쩌지? 그 순간 베네치아의 수많은 가면들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베네치아에선 누구나 그렇게, 잊었던 자신의 얼굴 속으로 빠져드는지 밤은 고요하고 부드러웠다.
여행작가
〉〉여행 팁
숙소:포레스트리아 발데스(Foresteria Valdese)
베네치아에서 오래된 저택에 머무는 느낌은 근사하다. 산타 마리아 포르모사 광장에서 칼레 룽아 산타 마리아 포르모사(Calle Lunga Santa Maria Formosa)를 따라가면 작은 다리를 건너자마자 보이는 이곳에서 잠들면, 누구든 베네치아의 고요 속에 오래 머물고 싶어진다.
가게: 카사노바 마스크(Casanova Mask)
가면 만드는 레즈가르를 만나 ‘코메디아 델라르테’ 이야기를 듣고 나면, 베네치아 거리가 훨씬 근사하게 느껴진다. 마치 중세시대로 돌아간 것만 같다. 칼레 델 크리스토, 산 폴로 2210.
숙소:포레스트리아 발데스(Foresteria Valdese)
베네치아에서 오래된 저택에 머무는 느낌은 근사하다. 산타 마리아 포르모사 광장에서 칼레 룽아 산타 마리아 포르모사(Calle Lunga Santa Maria Formosa)를 따라가면 작은 다리를 건너자마자 보이는 이곳에서 잠들면, 누구든 베네치아의 고요 속에 오래 머물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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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마다 가면 가게가 하나 둘씩 있다. 전통 가면에 현대적인 예술을 가미해 다투어 더 화려해지려는 얼굴들. 사람들은 원하는 자신을 하나씩 사서 간다. |
가면 만드는 레즈가르를 만나 ‘코메디아 델라르테’ 이야기를 듣고 나면, 베네치아 거리가 훨씬 근사하게 느껴진다. 마치 중세시대로 돌아간 것만 같다. 칼레 델 크리스토, 산 폴로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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