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름을 용납하지 않는 ‘끔찍한 사회’ 장면 1.
1993년, 유럽 역사에 기념비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12개 국가를 주축으로 하는 단일유럽, 유럽연합(EU)이 탄생한 것이다. 서로마 제국의 붕괴 이후, 1500년 만의 실질적인 재통합. 그런 EU의 탄생에는 독일의 참여가 결정적이었다. 경제력으로 보나 인구 수로 보나 유럽 최강국임에도 불구하고, 주변국들이 독일의 EU 가입을 반대할 경우에는 EU 자체가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70년 전, 나치를 앞세워 프랑스, 폴란드, 네덜란드, 노르웨이 등 17개 유럽 국가들을 유린하고 유태인들을 600만명이나 학살했던 독일이 반세기 만에 EU 창설의 주역으로 초대받게 된 데는 남다른 노력이 있었다. 예를 들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내에서는 공식적인 졸업식이 사라졌다. 자칫, 권위주의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음악 시간의 합창마저 없어졌다. 물론, 운동회 같은 집단 행사도 폐지됐다. 그렇게 전체주의적으로 흐를 만한 행사들은 하나 둘씩 독일에서 자취를 감췄다.
장면 2.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원폭을 얻어 맞은 일본이 무조건 항복했다. 이후, 아시아의 스위스를 만들겠다는 맥아더 장군의 계획대로 일본은 농업 국가의 길을 조금씩 걸어나간다. 하지만, 이상(理想)도 잠시. 중국이 공산화되고 북한이 남침을 감행하면서 미국의 계획은 급격히 수정된다. A급 전범, 기시 노부스케를 수상에 앉힘으로써 일본의 외교권과 군사권을 장악하고, 열도를 공산주의 방패막이로 삼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일본은 옛 제국주의 인사들이 국가 행정을 주무르기 시작하면서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장면 3.
![]() |
◇도쿄 이케부쿠로에 있는 란도세루 전문점의 내부 정경. 소학교 6년 동안 매고 등교해야만 하는 란도세루는 가죽으로 만든 까닭에 중고품은 2만∼3만엔 정도이며, 고급품은 10만엔을 훌쩍 넘는다. |
장면 4.
6개월이 지나자 웬만큼 일본을 알게 됐다고 자만하기 시작했다. 그리곤 초대받은 초등학교 운동회. 한국에서도 큰 아이의 운동회를 보아온 지라 기대감에 들떠 학교로 향했다. 이후, 6시간 내내 이어진 충격과 당혹감. 운동회라기보다 거대한 집체극을 ‘시찰’하는 느낌이었다. 교장 선생님과 교직원들 앞에서의 엄숙한 선서 이후, 곧바로 이어진 학생들의 응원전에서는 군대를 방불케 하는 절도 있는 동작이 참여자와 참관자의 전투 의욕을 서서히 고조시켰다.
![]() |
◇일본 소학교 운동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계체조. 10인 1조가 돼 인간 피라미드 쌓기를 연출하고 있다. 잘 훈련받은 군인들을 방불할 정도로 정교해 마치 거대한 집체극을 참관하는 기분이다. |
하지만, 필자를 더욱 놀라게 한 사실은 이날 진행된 수많은 행사들의 연계가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고 매끄럽게 이어졌다는 것. 기계체조를 마치면, 100m 달리기로, 100m 달리기가 끝나면 줄다리기로 이어지는 과정은 톱니바퀴처럼 딱딱 들어맞았다. 얼마나 사전 준비를 철저히 했는지, 예행연습과 도상연습을 어찌나 많이 했는지, 100m 달리기를 하는 와중에 운동장 한쪽 구석에서는 선생님과 고학년들이 줄다리기 도구를 챙기고, 줄다리기가 끝나면 대기하고 있던 팀이 무섭게 줄을 걷어갔다. 군 부대에서도 소화해내기 힘든 완벽함. 운동회는 정확하게 3시에 끝났다.
운동회에서 받은 충격이 너무 컸기에 미국에서는 운동회를 ‘어떻게 하나?’ 인터넷을 뒤져 봤다. 그랬더니 하는 곳, 하지 않는 곳 등 제각각이기는 하나 운동회를 하는 학교들은 공통적인 특색을 지니고 있었다. 즉, 학생들에게 사전 연습을 시키는 일 따윈 하지 않는다는 것. 심지어 어느 학교에서는 선생님에게 물풍선을 던지고, 즉석에서 신발 벗어 멀리 날리기 대회를 개최하는 등 그야말로 신나게 즐기다 돌아오는 가을날의 ‘축제’로 승화시키고 있었다. 2학기가 시작되자마자 운동회 준비로 매주 서너 번씩은 파김치가 돼 돌아오던 필자의 아이들이 머릿속에 겹쳐지는 순간이었다.
![]() |
◇일본 고등학교 학생들의 하교 모습. 새까만 교복에 가방까지 통일된 학교 생활을 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교육받으며 자라기에 일본에서의 삶은 조직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철저히 인식된다. |
![]() |
◇TV에 방영된 일본 회사의 면접 대기실. 모두 검은색 정장에 흰 와이셔츠와 블라우스를 입고 있다. 공산국가의 인민복 마냥 제복과 유니폼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게 일본인들의 숙명이다. |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