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7년의 메이레키(明歷) 화재를 상세히 기록한 ‘무사시아부미’에 실린 그림. 현재 도판은 도쿄 도립중앙도서관에 있다. 출처:소방방재박물관 홈페이지 |
일전에 일본인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네 가지로 지진과 벼락, 화재와 아버지를 언급한 바 있다. 오늘은 그 세 번째에 해당하는 ‘화재’ 이야기다. 사실, 화재는 일본인들의 삶 속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필요악으로 존재해 왔다. 오죽 화재가 많았으면, 화재 다반사가 일상 다반사였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일까.
◇영화 ‘타워링’의 광고 포스터. 미국에선 1974년 개봉했음에도 한국에선 여러 이유로 3년 뒤인 1977년에야 개봉됐다. 당시 초호화 캐스트로도 화제를 모은 ‘타워링’은 당해 국내 흥행성적에서도 2위를 차지할 만큼 성공한 작품이었다. |
필자를 경악하게 하는 것은 그러한 기록을 일일이 남겨놓은 일본인들의 철저함과 집요함에 있다. 얼마나 화재에 대한 피해의식이 심했으면 수백건 이상의 기록들을 청사(靑史)에 빠짐없이 남겨놓았을까 싶은 이유에서다. 하지만 대화재의 피해 규모를 찬찬히 들여다 보노라면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재난사에 절로 고개가 끄떡여진다.
일본의 대도시 가운데 일왕이 거주하는 데다 문화재도 많아 화재 발생이 가장 적었던 쿄토(京都)에서도 1708년 3월 대형 화재가 발생해 황궁과 가신(家臣), 무장(武將)들의 집을 전소시키며 364개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든다. 당시 소실된 가구 수는 무려 1만3051개. 하지만 22년 뒤인 1730년 6월 다시 화재가 발생하면서 이번에는 132개 마을, 3858가구가 소실되고 808명이 사망하는 비극을 낳는다. 그러고 보면 1788년 1월에도 대형 화재가 발생, 이틀간에 걸쳐 1424개 마을에서 3만6797가구가 전소돼 백성들이 그 어느 해보다 추운 겨울을 보내게 된다.
문제는 교토의 사정이 오사카(大阪)나 도쿄(東京)에 비하면 훨씬 양호했다는 것. 일찍부터 상업이 발달하며 대도시를 형성했던 오사카의 경우 십 년이 멀다 하고 발생하는 대형 화재로 시민들은 숱한 고초를 겪어야 했다.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피해가 컸던 화재로는 1716년 3월 하순에 발생한 묘우치야케(妙知燒) 대화재를 꼽을 수 있다. 당시 오사카 전 지역의 약 3분의 1이 피해를 입는 참사로 408개 마을이 소실됐으며 사망자도 300여명에 달했다. 화재 참사는 이후에도 끊이지 않아 19세기 말인 메이지(明治) 시대만 하더라도 1875, 1880, 1881, 1884년에 각각 대화재가 발생했다.
◇화재가 일상 다반사로 발생했던 에도(江戶)의 트라우마는 지금도 도쿄 곳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사진은 일정한 간격으로 시내 곳곳에 설치된 방화용 소화기. 일반인들이 함부로 열지 못하도록 봉인한 종이가 이채롭다. |
이 밖에도 1772년의 화재와 1865년의 화재 역시 수천명의 인명을 살상한 재난으로 악명이 높다. 그런 와중에 1806년 발생한 화재 참사에서는 다음날 호우가 쏟아지며 홍수까지 발생, 불 타 죽고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120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렇게 도쿠가와 이에야쓰가 에도에 막부를 세운 1603년 이후, 열도의 수도에서 발생한 주요 화재는 200건을 훌쩍 넘는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근대의 에도사(江戶史)는 화재사(火災史)나 매한가지다. 오죽했으면, ‘화재와 싸움은 에도의 꽃’이라는 속담까지 생겨났을까.
다음에는 세계 최고의 화재 왕국이 될 수밖에 없었던 열도의 숙명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려고 한다. 더불어 일본인들은 이 같은 악조건에 어떻게 맞서며 살아왔는지에 대해서도 곁들어 설명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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