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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진의 차맥] 〈51〉 조선후기 선비 차인들 ① 허균·허난설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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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01-14 20:16:29 수정 : 2013-01-14 20: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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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마시며 자연과 일체 ‘신선의 경지’ 구가하다
허균 대표적 차시 ‘누실명’ 남겨… 매월당에 근접 인물
허난설헌 빼어난 시집 ‘난설헌집’ 출간 中·日서 애송
조선 전기의 최고의 인물로 매월당 김시습을 손꼽을 수 있다면,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허균(許筠·1569∼1618)이다. 흔히 허균은 조선 전기에 넣는 것이 통례인데 그의 혁명적 사상이나 평등사상의 실천으로 볼 때 후기의 인물로 넣는 것이 바람직한 것 같다.

매월당이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썼다면 허균은 최초의 한글소설인 ‘홍길동전(洪吉童傳)’을 썼다. 금오신화는 일상적·현실적인 것과 거리가 먼 신비로운 세계를 그린 전기소설로 주역의 태극음양 사상을 반영한 소설이다. 홍길동전에 신비주의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적서(嫡庶) 문제는 물론이고, 현실정치의 부정부패를 비판한 사회성이 강한 소설이다.

허균의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이다. 교산의 교(蛟)는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를 말하는데 그가 태어난 강릉의 사천진해수욕장 앞에 있는 야트막한 산을 말한다. 산의 형상이 꾸불꾸불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허균은 그 이름대로 끝내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로 끝나고 만 것일까.

허균은 동지중추부사 허엽(許曄)의 3남 3녀 중 막내이다. 허엽에겐 세 아들이 있었다. 허성(許筬)은 허균의 이복형으로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역임하였고, 동복형인 허봉(許?)은 유희춘의 문인이며 허균을 가르칠 정도로 학문이 상당히 수준급에 달했던 인물이다. 또한 허균과 동복누님으로 우리에게 여류문인으로 알려진 허난설헌(許蘭雪軒·1563∼1589)이 있다.

허균은 1594년 문과에 급제한 뒤, 명나라에 정사(正使)와 부사(副使)로 중국에 세 차례나 다녀온 외교전문가였으며, 역사·문학 등 해박한 국제적인 지식은 그의 무기였다. 성리학을 하늘처럼 떠받들던 시대에 불교와 양명학 서적을 탐독하고, 서얼들과 어울렸던 시대적 이단아이자 반항아였다.

부친 허엽은 동인의 영수였고, 형인 허성은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진 뒤 남인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허엽은 서경덕의 수제자로 부제학, 경상감사를 지낸 인물이다. 벼슬길에서 물러난 뒤 강원도 명주군 사천면 애일당(愛日堂)에 낙향했다.

허균 집안은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오르긴 했지만 학문적 내림으로는 서경덕의 주기론(主氣論) 전통을 암암리에 따르고 있는 셈이다. 정통 주자학 양반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강릉의 허균과 허난설헌의 생가터 주변은 현재 유적공원으로 조성되어 해마다 문화제가 거행되고 있다. 사진은 난설헌 허초희의 동상.
허균은 허난설헌과 함께 형의 친구이며 당시 ‘삼당시인’(三唐詩人)의 한 사람인 손곡(蓀谷) 이달(李達)에게 수학했다. 이달은 그가 서류(庶流) 출신이라 불우하게 지냄을 안타깝게 여겼다.

허균은 서류 문인들과 교유하는 한편 어릴 때부터 적서 차별 등 사회 제도의 모순을 체험함으로써 대북파(大北派)에 합류하여 사회개혁을 노렸으며 이이첨(李爾瞻) 등과 사귀었다. 이이첨은 대북파의 영수로 정인홍(鄭仁弘)과 함께 광해군의 옹립을 주장하였다. 당시 선조의 뜻을 받들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려는 유영경(柳永慶) 등 소북을 논박하여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일약 예조판서에 오른 인물이다. 그 후 영창대군을 서인(庶人)으로 떨어뜨려 강화에 안치시키고 이듬해 영창대군을 살해하는 한편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론을 발의해 서궁(西宮·지금 덕수궁)에 유폐하는 등 생살치폐(生殺置廢)를 마음대로 자행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자 이이첨과 그의 아들 원엽(元燁)·홍엽(弘燁)·대엽(大燁) 삼형제도 처형되었다.

허균이 이이첨 세력과 동조한 것은 인생에서 결정적인 흠이 되었다. 1618년(광해군 10), 50세에 반역죄로 거사 도중 처형당한다.

허균은 ‘수호전(水滸傳)’을 백독할 만큼 열정이 강했으며, 문학 비평에도 뛰어났다. ‘국조시산(國朝詩刪)’은 그가 공주목사(公州牧使)로 가 있을 무렵, 고려 말에서 조선시대까지 시인들의 시 888편을 뽑아놓은 시집으로 유학자뿐 아니라 도가(道家), 여류(女流), 승려 등의 시까지 포함됐다.

허균의 집안은 강릉 명문가 중의 하나였다. 부친 허엽은 호가 초당(草堂)으로, 오늘날 유명한 초당두부 그 집안이다. 허균의 동복형인 허봉은 창원부사를 지냈는데 중국에 갔던 기록인 ‘조천기(朝天記)’를 썼다. 그 조천기에는 중국에서 차를 마신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들은 중문 밖 동랑의 인가에서 소흥차를 마셨다. (중략) 찻종을 들고 두 대인과 우리에게 차를 올렸다.”

허균의 형제와 누님인 허난설헌 등 형제남매들은 모두 차를 즐겨 마셨고, 훌륭한 차시를 남겼다. 이로 미루어 양반 가문에는 으레 차를 상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허균은 그의 형제 중에 가장 많은 차시를 남겼으며, 내용 또한 그 무게가 심상치 않다.

“새 용단(龍團)을 잘게 쪼개 달이니/ 그 맛은 밀운(密雲)도 저리 가라고 하네./ 의연한 설수(雪水)는 한가로운 맛이니/ 모르는 이들 낙노(酪奴)라 부르지 마오./ 갈증 나서 일곱 잔을 모두 마시니/ 답답함을 없애주는 품이 제호(醍?)보다 낫도다./ 호남에서 따온 차가 특별히 맛있다고 하니/ 이로부터 나는 천지(天池)차 복노(僕奴)가 되었도다.”(‘음신다·飮新茶’)

위의 시는 당시 최고의 차를 품미(品味)하였음을 과시하면서도 겉치레가 아니다. 허균은 당대의 ‘차 마니아’였다. 천지차가 내 복노(僕奴)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거꾸로 말하면 자신이 천지차의 마니아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바람은 활짝 핀 꽃을 어루만지고 새 소리와 어우러지네./ 검은 대숲에 비 내리니 차 연기 젖는다네./ 조용히 반나절을 맑은 마음으로 보내니/ 평지에도 신선 있음을 이제야 알겠구려.”(‘최정언가소작·崔正言家小酌’)

허균은 바쁜 중에서 항상 한가한 시간을 내어 차를 즐긴 것 같다. 차를 마시면서 자연과 하나가 되는 신선의 경지를 구가하였으니 역설적으로 혁명적 사고도 하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신선이라는 것이 산중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시중에도 있음을 말한다. 허균이야말로 풍류차인의 전범이다. 그에게 청담차, 풍류차의 정신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소원(小院)의 주랑엔 해가 기울었고/ 처음 달인 햇차를 은사발로 마시네./ 못에 심은 연꽃 봉우리 잎을 드리웠는데/ 비 맞은 장미는 벌써 꽃이 활짝 피었구려.”(‘해양기회·海陽記懷’)

허균의 심미안이 예사롭지 않다. 차를 마시면서 연지의 연꽃과 커다란 이파리를 감상하고 있는데 그 옆에서 장미는 벌써 만개하여 비에 젖어 있다. 계절의 오고 감을 즐기면서 차를 마시는 품이 자연의 미(美)식가 같은 경지이다.

“비 온 뒤에 물이 불어 물가는 다 묻히고/ 한 줄기 차 연기는 대 바람에 푸르구나./ 지는 해 발에 걸리니 사람들은 흩어지고/ 종이창 밝은 곳에서 황정경(黃庭經)을 읊는다네.”(‘즉사·卽事’)

황정경이란 도가의 경전이다. 허균은 과거를 위해 유가적 공부를 하였지만 이미 마음은 도가에 가 있다. 이는 매월당을 보는 듯하다. 매월당보다는 사회의식이 강해서 부정부패의 혼탁한 사회를 한탄하기보다는 사회를 보다 적극적으로 변혁시키려고 한 점이 다르다.

“깨끗하게 솔을 씻고 새물로 차 달이니/ 바람에 쳐진 각건(角巾) 그림자 너울너울.”(‘부사·賦事’)

“차 솥과 경전이 바로 생활이네./ 청려장과 초, 나막신이 행장(行裝)이라네./ 조만간 임금님이 돌아감을 허락하면/ 호숫가에 맨 머리로 마음껏 노래하리.”(‘오창·午窓’)

차 마시는 것과 경전 공부하는 것이 바로 생활의 전부라고 말한다. 그는 이미 벼슬살이보다는 자연과 더불어 살면서 맨몸(맨머리)으로 노래하고 살 것은 자신에게 요청하고 있다.

“찻 사발에 차 달여서 목마름을 없애려 할 때/ 어찌하면 우통수(于筒水) 좋은 샘물 얻어올까.”(‘서회·書懷’)

그의 차 마니아의 경지는 결국 차의 맛이 좋은 물맛에 달려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정도이다. 그래서 저 유명한 오대산 우통수의 샘물을 떠올리고 있을 정도이다.

“붓을 던졌으니 엄성의 기와벼루 마른 지 오래고/ 초강(焦坑)이 이제 막 익었으니 용단(龍團)이나 달이세./ 궁벽한 땅이라 오가는 이 없다 말하지 마오./ 산벌이 하루 두 번 문안하네.”(‘휘객독차·?客獨茶’)

‘홍길동전’의 저자이자 조선 후기의 대표적 지식인 허균의 차시 ‘누실명(陋室銘)’이 새겨진 허균의 시비.
“손바닥만 한 작은 방에 남으로 문을 두 개 내니/ 낮에는 볕이 쪼여 맑고 따뜻하다네./ 비록 집이라지만 벽만 서 있고 사방에 책만 흩어져 있다네./ 쇠코잠방이를 걸친 탁문군(卓文君)의 짝이 되어/ 반 사발의 차 마시고, 향 한 묶음 피운다네./ 한가롭게 묻혀 살면서 건곤과 고금을 생각하네./ 남들은 누추한 곳에 어떻게 사느냐고 묻지만/ 내게는 맑은 신선의 삶이라네./ 마음과 몸이 편안한데 누가 누추하다고 하는가./ 내가 누추하다고 하는 곳은 몸과 마음이 썩은 곳이거늘./ 원헌(原憲)은 띠집에 살았고, 도잠(陶潛)도 흙담집에 살았다네./ 군자가 사는 곳에 어찌 누추함이 있으랴.”(‘누실명·陋室銘’)

‘누실명’은 허균의 대표적인 차시이다. 이 차시로 보더라도 조선 후기에서는 허균이 가장 매월당에 근접한 인물로 보인다.

허균의 차시를 보면 그는 이미 중국 남북조시대의 도연명(陶淵明)처럼 ‘귀거래사’를 읊으면서 자연과 더불어 전원생활을 즐기면서 사는 것을 희구하고 있고, ‘장자(莊子)’에 나오는 원헌(原憲)처럼 자연과 더불어 소박하게 살 것을 천명하고 있다. 그는 다선일미(茶仙一味)를 실천한 셈이었다. 그의 차시 내용을 보면 차 정신이 홍길동전과 결코 떨어질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의 사회개혁 의식은 그를 온전하게 자연과 더불어 살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허균은 양반가문 출신이었고 벼슬도 하였지만 적서(嫡庶)를 가리는 주자학의 전통이 못마땅하였고,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생각, 다시 말하면 근대적 사고를 한 인물이다. 홍길동전의 줄거리를 잠시 살펴보자.

홍길동전의 줄거리를 보면 조선 세종 때 홍판서가 대낮에 용(龍)의 정기가 자기 입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보통 일이 아니라 생각한다. 이에 정실부인과 관계를 청하려 했으나 거부하여 집안 시비인 ‘춘섬’과 관계를 가져 홍길동을 낳았다.

길동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비범하여 경전을 배우는 한편 도술(구름타기·육갑신장소환)에 통달한다. 그러나 자라면서 서자(庶子)라는 신분적 제약을 비관한다. 홍문의 애첩인 ‘초낭’의 질투로 인해 자객에게 암살위협을 당하자 아버지 어머니와 이별하고 집을 나선다.

처음 찾아간 곳이 도적의 소굴이고 그곳에서 두목이 된다. 그는 먼저 해인사의 보물을 탈취하였으며, 활빈당을 조직하여 팔도수령의 부정 축재한 재물을 빼앗아 빈민 백성들에게 나누어준다. 결국 조정의 공개수배 대상이 된다. 홍길동이 쉽게 잡히지 않자 조정에선 적자 형인 ‘인형’과 부모를 내세워 병자판서를 제수하겠다고 회유한다.

길동은 사모관대하고 초헌(?軒)을 타고 대궐 안에 들어와, 평생의 한을 풀어 준 천은(天恩)에 감사하지만 이내 공중으로 사라진다. 비로소 왕은 그 기이한 재주에 감복하여 길동 잡기를 단념한다. 길동은 왕에게 하직하고 부하를 데리고 고국을 떠나 남경으로 가다가 산수가 화려한 율도국(栗島國)을 발견한다. 그 섬에서 요괴를 퇴치하여 불모로 잡혀온 미녀를 건지고 율도국왕이 된다. 마침 아버지가 죽으매 부음을 듣고 고국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삼년상을 마치고 다시 율도국으로 돌아가 나라를 잘 다스린다.

허균이 홍길동전에서 우리나라를 무대로 하고 있을 뿐 아니라 꿈꾼 이상향이라는 것은 그의 신선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그의 율도국은 흔히 양반전의 ‘빈 섬’과 비교가 된다.

그는 조선도 중국도 아닌 새로운 공간인 율도국을 무력으로 점령하여 차지한다. 율도국은 봉건지배 체제에서 탈피한 국가도 아니며, 박지원의 ‘허생전(許生傳)’의 ‘빈 섬’과 같은 특별한 이상을 실현한 공간도 아니다. 율도국은 ‘산무도적(山無盜賊)과 도불습유(道不拾遺)’하는 이상향으로 그려지고 있다.

허난설헌은 빼어난 시로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쳤다. 명나라 주지번(朱之番)에게 알려져 ‘난설헌집(蘭雪軒集)’이 출간되어 애송되었고, 이 책은 일본에서도 간행되었다. 그에게 오빠인 허균의 영향은 어릴 때 이이첨에게 공부할 때부터 계속되었다.

“정자는 산 이름 내 마음속에 있고/ 내 마음은 늘 산림에 있다네./ 느리고 느린 날, 차 연기 구불구불 피어오르고/ 꽃 그림자 조각조각 그림을 이루네./ 잔 가득 의부(蟻浮)를 청탁불문 마시는데/ 주렴 밖의 제비는 가락에 맞추어 노래하네./ 봄나들이 걸음걸음 구름 자욱 따르고/ 개울 따라 오다 보니 깊은 줄도 몰랐다네.”(‘춘경·春景’ ‘산정사시·山亭四時’)

허난설헌의 시 감각은 현대의 이미지즘 시인을 뺨칠 정도이다. 시어의 콘트라스트는 물론이고 제 감각의 음양은 물론이고 대구(對句)를 세우는 솜씨도 일품이다. 이 한편의 차시에는 차의 ‘느림의 미학’은 물론이고, 차와 술과 음악이 어우러져 있다. 그녀를 두고 어찌 선녀(仙女)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허균 형제의 삶과 차와 시는 조선 후기의 가장 두드러진 차사를 이룬다.

박정진 문화평론가 pjjdisc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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