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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진의 차맥(茶脈)]〈57〉 조선 후기 선비 차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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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04-22 21:56:36 수정 : 2013-04-22 21:5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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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학의 태두’ 김장생 가문답게 대대로 다풍도 이어가
김장생, 아버지 3년상 가례대로 치뤄
문란해진 질서 확립… 조선 예학 집대성
저서 ‘가례집람도설’서 제기도 그려
사대부의 차에 대한 깊은 조예 묻어나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법전의 정비와 예학(禮學)의 정립은 일상의 삶의 원칙과 기준을 정한다는 점에서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차에도 다례(茶禮)가 있다. 오늘날도 한국의 차 문화를 대표하는 말은 ‘다례’이고, 그것을 문화적으로 세련되게 한 것이 다예(茶藝)이다.

임진왜란·인조반정·정묘호란 등으로 당시 사회는 혼란에 빠졌고, 신분제의 붕괴와 연애결혼 등이 등장하였다. 동시에 각종 범죄가 확산되었다. 문원공(文元公)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1548∼1631)은 무너지는 사회질서를 확립할 대안으로서 예(禮)를 제시하였다.

한국의 예학은 조선 후기에 오면서 실사구시의 정신에서 너무 벗어나서 예학논쟁을 불러일으키는 바람에 예의범절의 순기능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늘어갔지만, 그렇다고 예가 없으면 또한 사람의 삶이 아니다.

조선 예학의 집대성자는 사계 김장생이다. 그를 두고 흔히 유학의 종장(宗匠)이요 예학의 태두라고 말한다. 그런데 사계의 후손들이 줄줄이 차시를 남기고 당대에 이름난 차인이었음을 전하고 있다. 김장생의 아버지는 사헌부 대사헌을 지낸 김계휘(金繼輝)이다.

김장생은 부인 창녕조씨(昌寧曺氏)와의 사이에 김은(金隱), 문경공(文敬公)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허주공(虛舟公) 김반(金槃) 등 세 아들을 두었다. 첫째아들 김은은 왜란 중에 소식이 끊기어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고, 둘째아들 김집은 김장생의 사상과 학문을 이었다. 셋째아들 김반은 인경왕후의 할아버지가 된다.

김집은 본처에서는 손이 없고 후처에서 자손을 둔 까닭으로 현재 사계의 적장자 봉사손은 셋째 김반 가문이 맡고 있다. 김반 가문은 후손에서 대제학 7명, 문과급제자 74명을 배출한 최고의 명문가로 알려졌다. 김장생은 부인 창녕조씨가 사망한 후 순천김씨와 재혼하여 아들 6명을 더 두었다.

김반은 두 아들 김익희(金益熙·1610∼1656)·김익겸(金益兼·1614∼1637)을 낳는다. 김익겸은 병자호란 때 순절하였고, 광성부원군 김만기와 유명한 국문소설가 서포 김만중의 할아버지가 된다. 사계 김장생의 손자인 김익희는 지난 회에서 소개했다. 김익희는 사계의 셋째아들 김반의 첫째아들이다. 김반의 둘째아들이 김익겸이다. 김익겸의 아들로 김만기와 김만중이 태어난다. 서석(瑞石) 김만기(金萬基·1633∼1687)의 차시를 보자.

“꿈 깨니 차 솥에서 차 끓는 소리 들리고/ 해당화 늦게 비 맞고 피었네./ 진종일 읊조려도 좋은 구절 떠오르지 않으니/ 흐림과 갬처럼 운수는 작은 해낭(奚囊)에 넣어두네.”

“향 연기 꾸불꾸불 전서를 쓰고/ 틈으로 들어온 먼지는 책상에 쌓였네./ 차 솥에는 차 끓는 소리(魚眼)/ 밖에는 어지럽게 비 내리는 소리.”

“잠이 와서 찻잔을 든 채로/ 꿈속에 그대 서재에 이르렀네./ 하현에 봄기운 가득 하고/ 어찌 동양(東陽)에서 길 잃은 것을 한탄하리.”

“맑은 그늘 아래 미풍은 불어오고/ 청려장 짚고서 남쪽 개울 건넜네./ 숲 너머 한 줄기 차 연기 일고/ 꾸부러진 개울의 끝자락에 작은 암자 있었네.”

“새소리에 눈뜨니 날이 밝았네./ 화악을 보니 푸른 기운 높이 떴네./ 산집에 눈 그쳐 시 한 수 쓰니/ 훈훈한 화로에 차가 끓고 있다네.”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1637∼1692)은 김만기의 아우이다. 김익겸의 유복자이다. 김만중은 과거에 급제하자마자 암행어사로 전국을 돌았고 공조판서를 지냈다. 여러 번 유배와 등용을 반복했다. 그가 이렇게 유배길에 자주 오른 것은 그의 집안이 서인의 기반 위에 있었기 때문에 당쟁을 피할 수 없어서였다. 현종 초에 시작된 예송(禮訟)에 뒤이어 경신환국·기사환국 등 정치권에 변동이 있을 때마다 그 영향을 심하게 받았던 것이다.

그가 남해에 유배되었을 때 어머니를 위한 ‘구운몽(九雲夢)’과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를 썼다. 위의 두 작품은 우리 소설문학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서포만필(西浦漫筆)’도 그가 남긴 유명한 수필집이다. 그는 한시보다 우리말로 써진 작품의 가치를 높이 인정하여, 정철의 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을 들면서 우리나라의 참된 글은 오직 이것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는 중국 소식(蘇軾)의 ‘동파지림(東坡志林)’을 인용하여 아이들이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를 들으면서는 울어도, 진수의 ‘삼국지(三國志)’를 보고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여 소설이 주는 재미와 감동의 힘을 긍정하였다. 이 때문에 그 자신이 ‘구운몽’과 ‘사씨남정기’ 같은 소설을 직접 창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규경의 ‘소설변증설’에 따르면 구운몽은 어머니의 시름을 위로하기 위해서 지은 것이며, 사씨남정기는 숙종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썼다고 한다.

서포 김만중의 차시를 보자.

“그대가 심장의 경(經)을 펼치니/ 첩(妾)은 천상의 꽃(花)을 뿌렸네./ 하늘 꽃 어지러움 끝내지 못하는데/ 우물 가 오동나무에 까치가 우네./ 사람들 이런저런 얘기하지만 상관 않고/ 사미에게 차를 전해 일가를 이루었네.”

“그냥 살 때는 태평세월 느끼지 못하고/ 늙어서야 반생을 부끄러워한다네./ 차와 냉이 맛도 알게 되고/ 지나간 세월 감개무량하다네./ 중선(仲宣·魏나라 시인 王粲)은 나그네 되어 부(賦)만을 생각했고/ 자미(子美·杜甫)는 슬플 때 옛날을 떠올렸다네./ 오교(午橋·낙양의 다리)에서 마시던 술잔 잊을 수 없고/ 꽃그늘 피리소리에 날 새는 줄 몰랐네.”

사계 집안의 다풍은 손자 익희와 증손 만기·만중에 이르러 꽃피우게 된다. 사계 집안의 다풍은 김만중의 종손자인 김춘택(金春澤·1670∼1717)에 이르고 있다.

“백발 드리우고 대베개 높이 베니/ 차 솥에서 푸른 연기 오르네./ 손에 든 책은 아물아물거리고/ 자획이 보일 듯 말듯 하네.”

사계의 집안이 대대로 굳건한 다풍을 이어가는 것은 조선의 예학을 이룬 집안의 가풍 때문일 것이다. 기록에 차시를 비록 남기지 않은 후손일지라도 훌륭한 차 생활을 하였을 것임을 의심할 수 없다. 예학의 집안에 어울리게 다례의 전통을 실천하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앞으로 사계의 광산김씨 집안에서 옛 문서를 살피면 차와 관련한 다례의 문서가 발굴될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조선 예학의 태두로 일컬어지는 사계는 중국의 주자가례와 조선의 삶에 알맞은 이기혼융설(理氣混融說)을 바탕으로 조선의 예학을 집대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계는 동국 18현에 봉안되었으며, 영원히 사당에서 모시며 제사를 나라에서 허락한 불천위로 매년 기제사(음력 8월2일)를 올린다.

사계가 동방예학의 태두가 된 것은 아버지 김계휘가 사망하자 3년상을 치르면서 비롯되었다. 김장생은 상례(喪禮)와 제례(祭禮)를 한결같이 가례(家禮)대로 하고, 아울러 초막을 짓고 살면서 무덤을 지키며 시묘살이를 냈다. 

김장생의 ‘가례집람도설(家禮輯覽圖說)’ ‘제기도’에 있는 다선의 모습. 중국 그림에는 없어서 자신이 그렸다고 쓰여 있다.
다음해 김장생은 송익필에게 편지를 써서 상중(喪中) 복제(服制)에 대해 의논했다. 예학 중 가장 중요한 복제문제에 대한 의견은 스승인 송익필·성혼에게 묻고는 그대로 3년상을 마쳤다.

김장생은 죽은 지 1년 만에 지내는 제사(소상·小祥) 이후부터, 죽은 지 2년 뒤에 제사 지내는 대상(大祥)을 치른 그다음 달에 지내는 제사(담제·?祭) 때 입는 상제의 옷(練服)에 대해 물었다. 송익필이 답하기를 “전후 두 차례의 서신이 정의(情誼)와 예의(禮意)가 극진하니 예학에 진보가 있음에 깊이 탄복하였다”고 했다. 김장생의 예학적 지식을 칭송하는 대목인데, 바로 그해 김장생은 ‘상례비요(喪禮備要)’를 완성했다.

사계는 처음에 구봉 송익필에게 예학을 배우고 후에 율곡 이이에게 성리학을 배워 예학파 유학의 거두가 되었으며, 그 뒤 우계 성혼의 문하에도 출입하여 수학하여 학문을 완성시킨다.

그는 1578년(선조 11년) 학행(學行)으로 천거받아 관직에 올라 창릉참봉·돈령부참봉 등을 지내는 것을 시작으로 임진왜란 때는 호조정랑으로 군량미 조달에 노력하였다. 인조 때는 호조참판과 형조참판을 지낸 뒤 가의대부 행용양위부호군에 이르렀다. 관직에서 물러나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그는 인조반정 이후로 서인이 집권하였을 때도 서인 산림파(산당) 영수로 공신세력에 대항하여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런 까닭에 송익필과 이이, 성혼 등의 계승자로 기호학파를 형성하고 확장하는 데 기여하였고 예학에 정통하였다. 김집과 송시열 등을 길러냈다.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 고정산 아래에 있는 사계 김장생 선생 묘역. 사계는 조선 예학의 태두로 일컬어진다.
김장생의 아버지 김계휘는 윤원형 일파, 심통원 일파 등 조정의 척신들에게 미움을 받고 인사 불이익을 당했다. 그는 할아버지 김호의 집에 맡겨져 교육받아야 했다. 할아버지 김호는 손자 김장생이 총명한 것을 보고 큰 인물이 되리라 예상하였다.

아버지 김계휘의 친구가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 구봉 송익필이었으므로 특별히 그들을 찾아가 수학하였다. 또한 아버지 김계휘는 사암 박순, 기대승 등과도 친구로 지냈으므로 훗날 사계는 그들의 문인들과도 인맥을 형성하였다. 송익필은 본래 서자의 후손이었지만 사람을 가리지 않던 아버지 김계휘와 삼촌 김은휘는 송익필과 송한필 형제를 각별히 아끼고 친구로 사귀었다.

사계는 1557년(명종 12년) 11살의 어린 나이로 예학자 구봉 송익필(宋翼弼)을 찾아가 사사했다. 1567년(명종 22) 서인의 당수이자 대학자인 이이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이이의 문하에서 수학함으로써 목은 이색-포은 정몽주-야은 길재-강호 김숙자-점필재 김종직-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정암 조광조-휴암 백인걸-율곡 이이로 이어지는 성리학의 학통을 수학하였다.

이이의 문하에서 도학과 예학을 수학하여 마침내 유학의 종장(宗匠)이요 예학의 태두가 되었다. 김장생은 이이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다. 이이가 구봉 송익필에게 글을 보내 말하기를 “김장생이 와서 20여일 머물면서 조용히 학문을 강론하고 있었는데, 그의 부친이 불러 돌아가게 되니 이때로부터 상장(相長)의 이익이 없게 되었습니다”라고 했다.

1575년(선조 8년) 가을, 아버지 김계휘가 평안도관찰사로 부임하자 김장생도 평안도로 갔다. 조선시대 평안도는 상업과 광업이 발달하여 물자가 많고 번화한 곳이었다. 유흥객들이 날마다 음악과 여색으로서 즐거움을 삼았고 김장생에게도 온갖 유혹의 손길이 왔다. 그러나 김장생은 모두 거절하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다. 여가가 있을 때 어울리더라도 조금도 오만하지 않고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향락을 기피하여 모두들 ‘보통 사람으로는 어려운 일’이라며 경외하였다.

김장생이 송시열에게 “내 젊었을 때 색욕을 금하고 공부에 전념하였다. 비록 오래 평안도에 머물렀으나 끝내 마음에 잡된 생각을 가져 본 바 없다”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13세부터 송익필의 문하에서 그리고 20세부터 이이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지만 과거에는 응시하지 않았다. 그 뒤 이이와 송익필의 천거로 경기도 파주군 파산(坡山)에 있는 우계 성혼(牛溪 成渾)의 문하에도 출입하여 수학하였다. 성혼은 조광조의 수제자인 백인걸의 문인임에도 이황의 주리론(主理論)과 이이의 주기론(主氣論)을 종합하는 독특한 의견을 보이고 있었다.

1578년(선조 11년)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6품직에 올라 창릉참봉(昌陵參奉)·현감 등을 지냈다. 선조실록에 의하면 1578년 3월 이조(吏曹)에서 경연관이 아뢴 바에 의해 곧바로 6품에 서용할 정구(鄭逑)와 취재(取才) 없이 서용할 남치리(南致利)·성호(成浩)·이덕홍(李德洪)·김장생(金長生)·구사민(具思閔)·권응시(權應時)·김윤신(金潤身)·문몽원(文夢轅) 등을 보고하였다.

이때 사계와 함께 등용된 인물로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가 있다. 김장생의 예학론을 중심으로 하는 정통주의 사상은 후에 기호학파 노론 집권세력의 정치이념과 사상적 근간이 되었다면, 한강 정구는 영남학파 남인, 북인계의 예학을 형성하여 조선예학의 쌍벽을 이룩하였다.

사계가 엮은 ‘가례집람도설(家禮輯覽圖說)’ ‘제기도’에 다선(茶?·찻솔)의 그림을 볼 수 있다. 사계는 제기도의 아랫부분에서 설명하기를 “제사상이나 관분(손 씻는 대야)·술주자 등은 중국그림을 모방하였으나 배교(산통)·축판(祝板)·다선과 찻잔받침은 내가 생각해서 그린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계의 ‘가례집람도설’은 그가 얼마나 차에 대한 조예가 깊었는지를 웅변하고 있다. 조선의 차문화 전통은 사대부와 선비사회에 깊숙이 뿌리박고 있었다.

박정진 객원논설위원·문화평론가 pjjdisc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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