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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진의 차맥(茶脈)] 〈59〉 조선 후기 선비 차인들 (9) 성호 이익과 제자 안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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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05-22 14:39:45 수정 : 2013-05-22 14:3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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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 전승과정마다 茶 등장 … 과학적 접근 돋보여
이익 ‘성호사설’ 다식 자세히 소개
본래 찻잎으로 만들다 곡물로 대체
감찰 관원들 모일 때면 ‘다시’ 풍습
악행 관료 벌하는 ‘야다시’도 성행
어느 나라의 문화이든 융성기가 있으면 침체기가 있고, 침체기가 있으면 다시 중흥기가 있다. 바로 중흥하여야 할 시기에 나라의 지도자들이 외래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잘 소화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낙오하고 만다. 낙오하면 결국 남의 나라의 지배를 받게 되고, 심하면 망국에 이르게 된다.

실학의 3대 거목인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1622∼1673),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난세를 살았던 탓에 항상 “이러다간 나라가 망하겠다”는 걱정을 하며 오직 저술에만 전념하다가 평생을 마친 공통점이 있다. 반계 유형원을 실학의 1조(祖), 성호를 2조(祖), 다산을 3조(祖)라고 말할 수 있다. 결국 이들의 다리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성호 이익이다.

‘성호사설(星湖僿說)’은 흔히 백과사전류로 분류되지만 40년 동안의 생각과 제자들과의 문답을 기록한 것으로, 후에 다산의 목민심서 등 1표2서(一表二書) 저술의 본보기가 되었다. 이익은 당색으로 보나 학문 내용으로 보나 다산의 삶의 모델이었다. 이익은 다산에 앞서 차인으로서 등장한다.

‘성호사설’ 제6권 만물문(萬物門)에는 ‘다식(茶食)’에 관한 글이 나온다.

“국가의 사전(祀典)에는 다식(茶食)이 있다. 쌀가루를 꿀과 반죽하여 나무틀에 넣고 다져 둥그런 떡을 만든 것이다. 사람들 가운데 다식의 이름과 의미를 아는 이가 없다. 다식이란 송나라의 대룡단(大龍團)과 소룡단(小龍團)이 잘못 전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차는 처음에는 물에 끓여서 먹었다. 주자가례(朱子家禮)에서 쓰는 점다(點茶)는 차를 갈아서 찻잔 속에 넣고 끓는 물을 부은 다음 솔(?)을 가지고 젓는 방식인데, 지금 일본 사람들의 차가 모두 이러하다. 정공언(丁公言:丁謂를 말함)과 채군모(蔡君謨:蔡襄을 말함)가 독특한 방법으로 다병(茶餠)을 고안해 조정에 바치자 드디어 세상의 풍습이 되었다. 소동파(蘇東坡)의 시에 ‘무이산 계곡에 좁쌀처럼 생긴 싹/정위와 채양이 몇 상자씩 따갔더냐’라고 한 구절이 그것이다. 지금 차례에 다식을 쓰는 것은 바로 앞에서 언급한 점다의 의미인데, 이름만 남고 실물은 바뀌었다. 집에 따라서는 혹 밤을 갈아 대신 사용하는 집도 있는데 물고기, 새, 꽃, 나뭇잎의 모양을 만든다. 이는 용단(龍團)이 와전된 것이다. 모난 그릇이 모나지 않게 만들어지는 일에 무슨 물건인들 그렇지 않겠는가?”

성호 이익과 문인들이 제작했다는 천리역학도
이익의 ‘다식’에 관한 글이 없었으면 다식의 변천과정을 모를 뻔했다.

다식은 본래 송홧가루, 검은깨, 쌀가루 등의 식물 전분질을 꿀에 개어 다식판에서 찍어낸 과자로, 이 말은 고려 말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시 구절 ‘팔관회에 다시 다식을 썼다(八關改服茶食)’에 나온다. 국가적 행사에 다식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 말에 병과(餠果)로서 널리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식의 원형은 단차(團茶)에서 비롯된 것이다. 본래 찻잎으로 단차를 만드는 것인데 언제부턴가 우리나라에서는 찻잎 대신 곡물에 꿀을 섞어 반죽하여 다식판에 찍어 제수로 사용했던 것이다.

다식은 가례에서는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 것이다. 제사를 지낼 때는 으레 향을 사르고 생(牲)·과(果)·포해(脯)·소채(蔬菜)·갱반(羹飯), 그리고 다식(茶食)을 제사상에 놓고 점다로서 삼헌을 하여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아마도 차의 생산이 줄어들고(?) 일반이 차를 구하기 어렵게 되자 용단차를 점다해서 제사에 올리던 풍습이 다식판에 다른 전분질과 꿀을 섞어 찍어낸 다식을 만들어 올렸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금은 다식의 의미가 달라졌다. 다식이란 차와 더불어 먹는 달콤한 과자류 음식이다. 근래 다식 만드는 풍습은 식물의 전분 등을 볶고 꿀에 개어 어조화금(魚鳥花禽)의 형태를 다식판에 찍어내는 것으로, 옛 다식판에 찍어내는 풍습이 전해진 것이다. 물론 다식 과자류는 본래의 단차보다 작은 게 특징이다.

다식의 근원에 대해서는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도 언급하였다. 육당은 “다식은 다례의 제수요, 다례는 지금처럼 면과로써 행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는 점다를 하던 것인데 찻가루를 다잔에 넣고 반죽하는 풍속이 차차 변하여 다른 식물질의 전분 등을 애초에 반죽하여 제수로 쓰고 그 명칭만은 원초의 것을 잉전함이라는 말로 수긍되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현재 다식에 관한 첫 번째 기록으로는 고려 문종의 넷째 아들인 대각국가(大覺國師) 의천(義天)의 문집에 보이는데, 다식을 조사제(祖師祭)에 올렸음을 전하고 있다.

성호 이익 초상화
이익은 관청에서도 ‘다시(茶時)’라는 제도가 있었음을 전한다.

‘성호사설’ 제12권 인사문(人事門)에 ‘다시’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성상소 감찰다시(城上所 監察茶時)’라는 말을 사람마다 입에 올리지만 그 의미는 모른다. 성상소란 옛 궁궐의 성가퀴 위라는 뜻이다. 곧 당시 대관(臺官:오늘날 검찰과 감사원에 해당)의 관원들이 회의하는 장소이다. 간관 가운데 공무를 행할 사람이 없으면 여러 감찰들이 번갈아 모였다가 마치는 것이다. 다시라는 말은 그들이 모여서 차나 한 잔 마시고 헤어진다는 뜻이다. 감찰은 옛날의 전중어사이다. 모든 관료를 단속하는 직책이라 반드시 자신이 먼저 검소하게 처신해야 하기 때문에 거친 베에 색이 바랜 옷을 입고 좋지 않은 말에 떨어진 안장을 얹었으니, 멀리서 바라보기만 해도 그가 감찰인 줄 알았다. 이것이 옛날의 관례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부유한 집의 자제일지라도 감히 그것을 바꾸지 못했다. 뒷날 한두 재상이 시론(時論)을 주장하여 편의를 따를 수 있도록 허용하더니 이윽고 화려한 의복을 다시 입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에 야다시(夜茶時)라는 말이 있었다. 재상을 비롯하여 이하 관료 가운데 누구든지 간악한 짓을 저지르고 못된 짓을 저질러 불법을 행한 자가 있으면, 여러 감찰들이 그 근방에서 야다시를 하여 그의 죄악을 흰 판자에 써 그것을 그 사람의 집 문 위에 걸어놓고 가시나무로 문을 봉한 다음 그 위에 서명하고 흩어진다. 그렇게 하여 그 사람은 드디어 금고(禁錮)가 되고 아주 몹쓸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야다시라는 한마디 말이 여항(閭巷)에서는 잠깐 사이에 남을 때려잡는 말로 전해지고 있으니, 아! 국가 전통의 아름다운 풍속을 언제 다시 볼 수 있겠는가?”

‘다시’라는 말은 사헌부 등 대간의 관리들이 날마다 한 번씩 모여 차를 마시며 자신의 직책을 논의하던 모임을 말한다. 정부 관리들이 차를 마시면서 중요한 일을 논의하던 풍습을 읽을 수 있다. ‘다시’라는 말을 통해 차를 마시는 일이 일상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익은 이전에는 주로 ‘다시(茶詩)’에 의존하던 차 문화의 유행과 경향을 실학의 정신과 함께 ‘차의 산문시대’로 바꾸었다는 점에서도 평가된다.

이익의 제자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1712∼1791)은 우리 동이(東夷)의 역사를 회복하게 하는 ‘동사강목(東史綱目)’을 써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이지만 차에 관한 ‘수다설(漱茶說)’을 썼다. 수다설은 차로 입을 헹구는 것을 말한다.

“입 안의 찌꺼기나 기름기를 가시게 하는 데는 어느 시대건 차가 꼭 빠지지 않는다. 그러나 은연중에 사람을 해치는 것이 적지 않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차를 많이 마신 뒤에 기운이 더 이상 병들지 않아 비록 해로움과 이익이 반반이 되지만, 양기를 녹이고 음기를 조장하니 이익이 손해를 보상하지 못한다고 걱정하는 사람이 많다’고 하였다. 나에게 한 가지 방법이 있어서 스스로 귀하게 여긴다. 매번 식사가 끝날 때마다 진하게 우린 찻물로 입 안을 헹궈 찌꺼기나 기름기에 낀 것을 차로 헹구어내면 저절로 떨어져 나가니 번거롭게 이를 쑤실 필요가 없다. 그리고 이를 다시 닦으면 이가 점점 단단해져서 충치가 절로 낫는다. 그러나 대부분 모두 중풍과 하품의 차를 사용하고 상품의 차가 늘 있지는 않으므로, 며칠마다 한 번씩 마시는 것 또한 해롭지 않다. 이는 크게 이치가 있는 것인데 아는 이가 드물다. 그래서 상세하게 기술한다.”

안정복은 차가 해로울 수 있음을 지적하면서 도리어 차로 입을 헹구는 것이 기름기를 제거하고 충치를 예방하는 데에 효과적임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품질이 낮은 차는 며칠마다 띄엄띄엄 마시는 것도 좋음을 말하고 있다. 이는 차에 관한 매우 과학적인 접근이다. 실학의 산문정신은 과학정신과 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실학자의 특성은 박람강기와 함께 학문의 넓이와 깊이를 동시에 가져 오늘날 세분화된 학문의 폐단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주장되고 있는 통섭(通涉)을 일찍이 이룬 인물이다. 성호 이익, 순암 안정복은 대표적인 그러한 인물이다. 이러한 특성은 다산에게로 이어져 실학의 집대성을 이루게 한다.

다산이 태어난 다음해에 성호가 세상을 떠나 성호의 가르침을 직접 받을 수는 없었지만 다산은 16세에 성호의 유저(遺著)를 읽어보고 큰 충격을 받고 성호처럼 학문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마음을 먹었다고 기록으로 남겼다.

다산이 22세 때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자 선조들의 묘소가 있는 안산(安山)의 선산을 참배한 뒤, 그곳에 가까이 있던 성호 선생의 옛집을 찾아가 성호의 옛 자취를 돌아보며 숭앙의 뜻을 표했다. 다산은 성호 이익의 초상화를 보고 그의 인품을 칭송하며 찬시를 지었다.

“저 덕성스런 얼굴을 바라보노라면/ 윤기 흐르고 함치르르함이여!/ 도가 저 몸 속에 가득 쌓였구려!/ 뛰어나고 빼어난 아름다움으로 흠뻑 적셔 있구려./ 누가 이분을 저 깊이 묻힌 땅 속에서 일으켜 세울 수 있어/ 끝내 억센 물결을 밀쳐버리고/ 수사(洙泗)의 물줄기로 돌려보낼 것인가./ 슬픈지고.”(星翁畵像贊)

“참으로 위대하시도다!/ 참으로 위대하시도다!/ 문호(門戶)는 지극히 바르고/ 법도(法度)는 지극히 엄격하시며/ 결은 지극히 기잡고/ 경지는 지극히 깊으시니/ (중략).”(星湖先生 讚)

다산이 가장 큰 영향을 받았던 실학자는 성호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실학의 전승과정에 동반한 공통의 물질로 ‘차(茶)’가 있었다. 이들은 모두 차인이었다.

다산은 유저를 통해 성호의 실학사상을 터득하면서, 특히 성호의 종손(從孫)이자 다산의 대선배였던 이가환을 통해서 성호의 학문을 죄다 소화했다. 

경기도 안산에 있는 성호기념관 전경
‘성호사설’은 천지문(天地門)·만물문(萬物門)·인사문(人事門)·경사문(經史門)·시문문(詩文門) 등 5가지 문(門)으로 크게 분류해 총 3007편의 항목에 관한 글이 실려 있다. ‘성호사설’에 담긴 이익의 사상은 흔히 거대한 호수에 비유된다. 그는 교조적인 주자학의 관념성을 극복하고 학문이 현실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경세치용의 입장을 견지했다.

이익은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라 붕당문제에 대해 누구보다 관심을 표명했고, 그 원인에 대해 양반 수와 관직 수의 개념을 도입하여 양반도 생업에 종사해야 하며, 궁극적으로 양반과 노비 등 신분제가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자신이 피해자이기도 했던 그는 조금도 당파성이 없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당쟁을 논하고 있다. 그의 붕당론은 어릴 때부터 골똘하게 생각해온 당쟁관의 총결산이며, 당파를 초월하는 그의 양식과 우국심의 발로이자 실학정신의 정형이다.

‘성호사설’의 부록으로 붙어 있는 ‘곽우록’(藿憂錄:곽우란 높은 벼슬을 하면서 국가 정책을 결정하는 ‘고기먹는 사람’에 대비되는 ‘콩을 먹는 사람’의 걱정이라는 뜻이다)’은 이 책의 요약이요 결론이다.

성호 이익은 남인 계열의 중추였다. 증조할아버지 상의(尙毅)는 의정부 좌찬성을, 할아버지 지안(志安)은 사헌부 지평을, 아버지 하진(夏鎭)은 사헌부 대사헌을 지냈다. 그러나 그가 태어난 바로 전 해인 1680년(숙종 6) 남인정권이 무너지고 서인이 재집권하는 경신대출척이 일어나 남인이었던 아버지도 진주목사로 좌천되었다가 곧 다시 평안도 운산으로 유배되었다. 그는 이 유배지에서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1682년 아버지가 유배지에서 죽은 후 어머니 권씨는 선영이 있는 경기도 안산의 첨성촌(瞻星村)으로 이사했고, 이후 안산 성호장(星湖莊)에서 이익은 평생을 지내게 되었다.

이익의 집안은 글자 그대로 일가학림(一家學林)을 이루었다. 혜환(惠?) 이용휴(李用休), 정산(貞山) 이병휴(李秉休), 죽파(竹坡) 이광휴(李廣休), 청담(淸潭) 이중환(李重煥), 두산(杜山) 이맹휴(李孟休), 금대(錦帶) 이가환(李家煥), 목재(木齋) 이삼환(李森煥) 등 선비들이 숲을 이루고 있을 정도이다.

이익은 종래 관념과 명분에 빠진 전통 유학에 반대의 기치를 들었다.

“글만을 읽고 성인(聖人)의 도리만을 말하면서,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하는 방책에 대하여 연구하지 않는다면, 그 학문은 개인생활에 대해서는 물론이거니와 국가적 관계에서도 무용한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은 그의 학문의 성격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안정복은 ‘성호 선생 시를 차운함’이란 시에서 스승의 도를 칭송했다.

“큰 도가 끝내 없어지지 않아/ 동방에 선생이 나셨다./ 퇴계 선생 바른 길을 따라/ 지극한 이치 많이 찬양했기에/ 은하수나루에 구름 걷히고/ 무궁화동산에 바람이 맑네./ 재능을 감추며 선철의 뒤를 밟고/ 종적 감추려고 초야에 숨었다네.”

안정복은 ‘성호사설’의 중복되고 번잡한 것은 삭제하고 다시 유별(類別)로 편차를 엮어 ‘성호사설유선(星湖僿說類選)’을 펴냈다.

박정진 객원논설위원·문화평론가 pjjdisc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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