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계가 들려주는 이야기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감독 데이빗 핀처·2009)의 주인공 벤자민 버튼(브래드 피트)에게 있어 시간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80대 노인에서 신생아로’, 말 그대로 거꾸로 된 ‘생체 시계’를 차고 태어난 그는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지만 다른 사람들과는 정반대의 시간 순서로 살아간다.
F. 스콧 피츠제럴드의 동명 소설을 극화한 이 작품은 개봉과 동시에 전 세계 관객들의 마음을 적시며 ‘시간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줬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1초, 1분, 1시간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그리고 순리에 맞게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를.
“1960년 4월16일 오후 3시. 우린 1분 동안 함께 했어. 난 이 1분을 잊지 않을 거야.”
홍콩영화 ‘아비정전’(감독 왕가위·1990)에서 주인공 아비(장국영 분)는 첫 눈에 반한 여인 수리진(장만옥 분)에게 이렇게 말하며, 짧은 시간에 영원한 의미를 부여했다.
바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시간의 소중함을 종종 간과한 채 살아간다. 1분 커녕 1시간의 시간도 무의미하게 흘려버릴 때가 많다. 하지만 우리가 허무하게 지나치고 마는 지금 이 순간, 찰나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소중하고 특별한 의미일 수 있다.
경기 파주 헤이리 문화예술마을(파주시 탄현면 법흥리)에 위치한 ‘타임 앤 블레이드 박물관(Time & Blade Museum)’은 이런 시간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장(場)이다. 지상 3층, 지하 1층으로 이뤄진 건물은 2년 전 완공됐다.
2대째 세계의 유명 시계들을 수집해오고 있는 이동진 관장은 “시간의 중요성을 알려주기 위해 박물관명(名)에 시계나 클락(Clock)이 아닌, 타임(Time)을 썼다”고 말한다. 1964년부터 이 대표의 부친이 모으기 시작한 시계는 현재 900여개에 이른다. 현재 타임 앤 블레이드 박물관에만 380여개가 전시돼 있다.
시계박물관 초입부터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스위스 장인들이 만든 시계들이 관람객들의 눈을 호강시킨다. 브레게(Breguet), 파텍필립(Patek Philippe), 바쉐론 콘스탄틴(Vacheron-constantin), 롤렉스(Rolex), 오메가(Omega), 불가리(Bulgari) 등 이름만 들어도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세계 명품 브랜드들의 제품들을 한 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
외국에는 각 브랜드별로 된 박물관이 따로 있어서, 타임 앤 블레이드 박물관처럼 한 번에 관람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지난해에는 ‘핵 안보 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장관 부인들이 이곳을 단체관람해 큰 호응을 얻었다. 학교와 유치원 등 단체관람 문의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이곳에 전시된 시계들은 주로 손목시계·회중시계·탁상시계 등 전통적인 방식으로 제조된 아날로그 시계들이다.
“보면 아시겠지만, 여기 전시된 시계들은 모두 각각의 ‘스토리(이야기)’를 가지고 있어요. 대부분 한정판 시계들을 모아놓은 것들이죠. 인도의 지도자 간디가 찼던 시계, 레이건 미국 전 대통령 퇴임 기념으로 제작된 시계, 1953년 에베레스트 첫 등정에 성공한 에드먼드 힐러리에게 롤렉스가 헌정한 시계, 1961년 세계 최초로 우주 비행에 성공한 유리 가가린이 비행학교 시절 찼던 시계 등. 물론 당사자들의 시계는 해외 박물관에 소장돼있는 경우가 많고, 당시 나온 한정판 시계들은 직접 구해 와서 이곳에서 전시하고 있습니다.”(이하 이동진 관장)
위인이나 유명인들이 소장했던 시계 외에도 시계의 역사와 구조를 한 눈에 알 수 있는 모형과 설계도들도 관람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시계들이 가진 스토리에 하나 둘 귀 기울이고 있노라면, 어느덧 세계여행을 하고 있는 기분이다. 이 관장은 “시계의 디자인, 영롱한 소리, 그리고 시간의 정직함을 보라. 어찌 안 빠져들 수 있겠는가?”라며 시계의 매력에 대해 설파했다.
“이제 시계는 시간만 보는 기계가 아니에요. 개인의 자부심과 자존심, 나아가 문화적인 상징이 되기도 하죠. 수백 개에 달하는 부품을 손으로 직접 깎아 만드는 캐비노티에(Cabinotier·시계장인)들의 시계는 기술과 예술의 융합체로서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어요. 중력에 의한 시간 오차를 줄이기 위해 고안된 뚜르비옹(tourbillon), 달의 변화로 시간을 알려주는 문페이스(moon phase), 자동 월력의 퍼페튜얼 캘린더(perpetual calender), 각종 크로노 그래프(chrono graph), 어두운 곳에서도 소리로 시간을 알 수 있는 미닛 리피터(minute repeater), 파워리저브(power reserve) 등 시계와 관련된 수많은 기술들이 경이로움과 감탄을 자아내죠.”
# 칼에 깃든 역사
이 관장이 시계뿐 아니라 칼(劍)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여행’ 때문이었다. 이슬람교와 크리스트교가 처음 생겨난 터키·이란·이라크 등 서남아시아, 실크로드 중앙아시아, 금속 산업이 발달한 스페인 등 세계 각지를 돌며 역사와 이야기가 깃든 칼들을 수집했다.
“지금 박물관에는 페르시아, 그리스, 중동, 스페인, 몽골(칭기스칸), 일본 등을 테마로 칼들을 전시해놨는데, 칼 하나에 세계 역사가 보인다는 게 신기하지 않나요? 칼은 피와 비극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생존의 역사이기도 하죠.”
타임 앤 블레이드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칼(검)은 500여 자루로, 박물관 측은 청소년들을 위해 칼과 관련된 다양한 역사·테마 기획전을 준비 중이다. 작년 여름방학 시즌에는 ‘동서문명의 십자로, 중앙아시아와 실크로드의 검’이란 주제로 기획전을 열었고, 올해 7월3일부터 8월31일까지는 ‘동서문명의 교차로, 터키의 검과 역사 유물전’을 연다.
전 세계 60여국을 돌아다니며 칼과 시계를 수집해왔다는 이 관장은 특히 ‘동서양의 문화가 만나는 지역’의 유물들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금속을 녹여 만든 칼 하나에 수많은 민족의 역사가 숨겨져 있다. 그것은 승리의 역사가 될 수도, 패배의 역사가 될 수도 있다.
중근동(中近東) 지역에서 시작돼 유럽으로 전파된 얇은 곡선 형태의 세이버(Saber·기병용 검), 프랑스에서 처음 만들어진 날이 없고 둥글고 뾰족한 형태의 직선 검 레이피어(Rapier), 페르시아에 기원을 둔 초승달 모양의 시미터(Scimitar), ‘넓은 검’이란 뜻으로 양손을 이용해 베는 브로드 소드(Broad sword), 그리고 수많은 철판을 겹겹이 붙여 검 표면에 빗살무늬를 지니고 있는 ‘이슬람의 마법’ 다마스커스(Damascus)까지. 박물관에는 일반인들이 평소에는 접해보기 힘든 진귀한 검들로 가득했다.
칼 수집을 통해 금속 제조 공법에도 관심이 생겼다는 이 관장은 박물관 지하에 실제 철을 녹여 칼을 만들어볼 수 있는 체험관(미니 대장간)도 마련했다. 전시품들을 눈으로 보는 즐거움 외에 직접 만들어보는 기회를 제공, 오감만족의 장으로서 관람객들의 발길을 이끈다.
이동진 관장은 공업용 세라믹 제조업체(HEATEC)를 운영 중인 사업가이기도 하다. 1960년대부터 세계를 돌아다니며 시계를 사 모은 부친의 뜻을 이어받아 2대째 ‘콜렉터(수집가)’로 활동 중이다.
지난 30여년간 터키, 이란, 이라크, 중앙아시아, 스페인 등 전 세계 60여개국을 돌아다니며 진귀하고 값진 시계들을 수집했다. 시계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칼로 이어져 2년 전 ‘타임 앤 블레이드 박물관’이 설립됐다.
“시계를 많이, 빨리 모으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라나는 어린이·청소년들에게 시간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는 일 분, 일 초 너무도 쉽게 시간을 허비하는 경우가 많아요. 제가 수집한 물건들, 특히 하나하나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물건들에 귀 기울여 보면 자연스럽게 시간의 소중함, 역사와 유래 등을 배우게 되죠.”
그가 평생 수집한 시계들은 약 900개, 칼은 약 500자루에 이른다. 이 관장은 “어떻게 그렇게 모았는지 스스로도 놀랄 때가 많다. 원하는 수집품들을 얻기까지 참 위험한 순간도 많았다”며 지난날을 회상했다.
“하루는 모헨조다로 도시 유적(파키스탄 펀자브 지방)에 갔다가 칼을 찬 파키스탄인 5명과 마주친 적도 있어요. 허리춤의 칼을 이용해 관광객들을 위협하는 거죠. 해외에서 경찰서에 끌려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고. 그땐 젊었으니까 가능했지 싶네요.”(웃음)
단순한 수집에 그치는 게 아니라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수집품들을 소개하고 그 가치를 설명해주고 싶다고 거듭 강조했다. 세계여행을 다니며 동서양의 역사에 심취하게 됐고, 그를 통해 삶의 지혜까지 깨우친 본인의 경험담을 우리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마음에서다.
“산다는 것. 우리는 결국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게 아닐까요. 저는 행복이란 게 ‘반복된 연습’에서 나온다고 생각해요. 반복이 주는 아름다움이 바로 시계죠. 처음엔 시계의 모양과 디자인에서 오는 예술성에 먼저 눈이 갔지만, 지금은 시계를 돌아가게 만드는 미세하고도 복잡한 과학기술에 감탄하고는 해요. 한 마디로 예술과 과학의 복합체라 할 수 있죠. 매일, 매시간 똑같이 반복하는 정직성에 매번 경이를 느껴요. 그리고 칼은 소리 없이 세계의 역사를 알려주는 소중하고 진귀한 물건이에요. 소재공업의 기초가 되는 합금 기술에 대한 공부도 되고요. 일례로 과거 이슬람교도들의 칼 공법은 현재까지도 여러 공업 분야에 활용되고 있답니다.”
▶관람안내
개관: 수요일~일요일 오전 10시~ 오후 6시 (매주 월, 화요일 휴관)
문의: 전화l. 031-949-5675 팩스. 031-949-5605
홈페이지:www.time-blade.com
▶ 찾아가는 길
주소: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 헤이리마을 1652-257
대중교통: 서울-합정역 2번 출구에서 2200번 시외버스 이용. 헤이리 1번 출구에서 하차.
일산-200번 버스 이용. 헤이리 1번 출구에서 하차.(200번 버스는 합정역까지 완행)
자동차: 자유로에서 파주(임진각) 방면 성동 IC 진입. 성동 사거리에서 좌회전. 1번 출구에서 직진.
본 콘텐츠는 <가족을 생각하는 TOYOTA(도요타)>가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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