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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라시압 벽화를 재구성한 모데의 상상도(왼쪽 그림)와 실제 벽화 중 조우관를 쓴 사절단(원 안)을 확대한 모습. |
이곳에서 함께 발견된 벽화의 오른쪽 하단 부분에 고구려의 독특한 복식인 조우관(鳥羽冠)을 쓰고 고구려 무기 환두대도(둥근고리 큰 칼)를 찬 외국 사절단이 남아있었던 것. 학계는 아라비아 상인과 교역했다는 고려보다 훨씬 앞선 1300년 전 이미 서역에 사신을 보낸 고구려의 자주성과 국제성에 크게 놀라며 7세기 무렵 고구려의 대외관계와 국제정세, 실크로드 기점 등에 관한 다양한 연구를 진행했다.
동북아역사재단이 최근 발간한 ‘중앙아시아 속의 고구려인 발자취’는 아프라시압 벽화에 관한 국내외 연구 성과를 집약한 보고서이다. 2006년 진행한 중앙아시아 고구려 유적 현지 답사와 현지 학자들과의 학술 세미나 내용 등을 담았다. 권영필 상지대 교수, 정수일 전 단국대 교수, 최광식 고려대 교수, 장준희 한양대 연구위원 등 연구팀과 루스탐 술레이마노프 우즈벡대 학장 등 현지 학자들의 논문 7편이 수록돼 있다.
권영필 교수는 ‘아프라시압 궁전지 벽화의 고구려 사절에 관한 연구’에서 당시 동아시아 국제정세 등을 감안할 때 고구려 사절이 돌궐 영향하에 있었던 사마르칸트에 간 시점은 651∼657년 일 것으로 추정했다.
권 교수는 미술사 측면에서 고구려 삼실총 벽화(5세기 후반)의 ‘지그재그식 건물 표현’과 유사한 둔황 285호굴 벽화 등으로 미뤄볼 때 조우관을 쓴 사람이 고구려 사신인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으며, 그 시기는 서돌궐이 잠시 세력을 회복한 때(645∼657)이고 방문 루트는 당의 영역을 피한 차오양(朝陽·당시 잉저우)∼내몽골 츠펑∼다둥∼후허하오터∼바오터우∼허시로 이어지는 ‘북방루트’일 것으로 추정했다.
최광식 고려대 교수는 아프라시압 벽화와 고구려 고분 벽화를 비교 검토한 결과 양국이 문양과 복식, 서역인의 모습, 줄타기와 장대장이 등 놀이, 춤추는 모습에서 서로 인적·물적 교류를 한 흔적이 엿보인다고 주장했다.
최 교수는 “당시 당과 대립하고 있던 고구려의 정치 상황으로 볼 때 고구려가 사신을 파견해 돌궐족이 장악하고 있던 사마르칸트와 외교 교섭을 시도한 것으로 파악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장준희 연구위원은 벽화 속 두 명의 사신이 중세 중앙아시아의 문화적 전통 속에서 머리에 깃털을 꽂았을 수도 있다며 두 사신이 한반도 사신이 아닐 가능성에 대한 연구도 병행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송민섭 기자 stsong@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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