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여운을 남기는 음악과 시 같은 작업을 하는 작가들의 작업 모습. 이우환, 로만 오팔카, 귄터 위커. 주세페 페노네, (왼쪽 위 부터 시계방향) |
로랑 헤기 프랑스 생 테티엔 미술관 관장이 엄선한 작가들로 학고재가 개관 20주년을 기념해 이들의 단체전을 25일까지 마련한다. 작업 방식들이 명료하고 정신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전시 제목도 ‘센시티브 시스템’이라 붙였다.
네 작가는 ‘탈경계’ 또는 ‘탈국가’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우환은 일본과 프랑스에 거주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는 한국인이며, 로만 오팔카는 프랑스를 고향으로 선택한 폴란드인이다. 주제페 페노네는 이탈리아 토리노에 살면서 파리에서 강의하고, 귄터 위커는 모국인 독일 외에 끊임없이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오가며 활동하는 작가다.
‘최소한의 개입으로 최대한의 세계와 관계하고 싶다’는 이우환은 빈 캔버스에 점 몇 개만 찍은 그림 5점과 조각 2점을 내놓는다. 그에게서 작품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작가의 신체를 매개로 하여 세계와의 만남을 추구하는 장소다.
지난 32년간 미적 유혹을 떨쳐버렸다는 폴란드 태생 프랑스 작가인 로만 오팔카는 1965년부터 계속해온 숫자쓰기 연작을 보여준다. 검정 바탕에 흰색 물감으로 숫자를 계속 써간다. 바탕색은 매번 1%씩 밝아진다. 나이 먹어감을 드러내는 것이다. 숫자를 쓰고 소리 내 읽으면서 녹음하고, 작업 후 완성된 캔버스 앞에서 자신의 사진을 찍으면서 시간성과 실존의 문제를 탐구하는 작가다. 그는 점점 죽어가고 있음을 ‘진보’라고 표현했다. 우리에게 시간이 있는 것은 죽음이 있기 때문이란다. 삶과 죽음의 메타포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삶이 흘러가는 강물처럼 작품 속에 흘러가고 있는 셈이다. 작품 설치도 작업의 일환이라는 그는 이번 전시를 위해 직접 방한해 작품을 디스플레이했다.
지난해 베니스비엔날레 이탈리아관 내부를 나무껍질로 뒤덮었던 주세페 페노네(61)는 나무의 나이테를 그린 드로잉 등을 통해 자연과 인간의 교감을 보여준다. 자연의 일부로서 인간의 내면적 아름다움을 환기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삶의 본질에 대해 명상하게 하는 그림이라 할 수 있다.
독일 작가 귄터 위커는 못이나 재, 회 등을 화면에 붙이고 바른 작품을 통해 삶과 죽음이라는 거대한 주제를 다룬다. 못 작업은 1957년부터 시작했는데 그동안 사용한 못은 대략 200t가량이 될 것이라고 한다. 평생 작품의 재료로 써온 못은 그에게 부정한 사회에 대한 항거의 표현이자 내적 고통의 표시이며 또한 치유의 도구다.
이들 네 작가가 천착하는 것은 형식적이거나 테크닉적인 방법론이 아니라, 근본적인 경험과 관점의 시각화다. 삶의 덧없음, 저항, 통합, 헌신, 참여, 감정이입에 대한 기본적인 내레이션을 담고 있다. 각자 상이한 길을 걷고 너무도 다른 방법을 사용하지만, 인간 경험을 내면화한 메타포를 끊임없이 찾는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인다. 시적이면서도 구체적인 느낌을 던져주고 있다. 원장현의 대금소리 같은 긴 여운이 느껴진다. (02)720-1524
편완식 문화전문기자 wansi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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